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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산 Mar 01. 2024

입춘 5(소설)

그 여자의 집

  낯선 도시에서 어린 아기하고 하루를 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처음으로 고향 동네를 떠나고 친정도 친구도 모두 수도권에만 있으니 전화 통화만이 유일한 낙이었다.

전화, 그것은 반가운 이에게 올 때는 즐거운 멜로디이고 시집으로부터 올 때는 무거운 누름돌이었다.            

  지방에 내려오자마자 아파트 분양을 받았다. 남편의 두 번째 직장에 오래도록 근무할 것이라 생각했고 가정 경제의 안정을 위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처음 그녀가 살던 근처에서 대규모로 분양하던 아파트를 분양받고 싶었으나 청약통장도 없고 상황도 되지 않아 신청하지 못했다.

  아파트 분양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소비를 줄이기 위해 저축을 먼저 고정시키는 방법으로도 생각되었다.

  그녀와 남편은 분양받은 아파트 건설 현장에 함께 가보았다.

  아직 터만 닦아 놓은 상태지만 그 넓은 부지 위에 그들의 행복이 펼쳐질 것 같은 기대가 솟아올랐다.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그들에게 집이 이르다고 했다. 서울도 아닌 지방 소도시에서 아파트 한 채 장만을 위해 저축하고 매월 용돈을 보냈다. 명절에도 그들 한 달 생활비가 되는 만큼의 돈을 주는데 시집에서는 그녀에게 왜 그리 욕심이 많냐고 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녀는 가정의 경제 기반을 다지기 위해 쓸 수 있는 돈을 고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남편 월급의 거의 60% 이상을 집값을 내기 위해 저축했다.

   아파트 분양을 받고 몇 개월이 지나 IMF 금융위기가 닥쳤다. 국가와 기업은 서민들의 꿈을 송두리째 흔들고 성실한 중소기업인들의 꿈을 앗아갔다. 한국의 성장과 기업을 탐내며 강대국 누군가의 이권을 위해 그 상황이 벌어진 것일까.

  주택 마련을 위해 수년간 주택 분양금을 넣은 많은 사람들의 땀과 꿈이 부도나는 건설사들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기업에게도 서민들에게 대출 규제하듯 엄격한 심사를 했더라면, 자산과 부채 비율을 조절하며 대출을 해주고 건실한 기업 운영이 되도록 했더라면 세계적 경제 흐름이 어떻든 간에 충격은 덜하지 않았을까. 소비와 지출, 누군가의 욕심이 만든 경제의 불균형이 서민들의 삶을 흔들었다.

  그녀가 분양받은 아파트는 입주가 늦어지기는 했으나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다. 다만 이자율이 10% 이상으로 올라가서 고정지출이 부담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녀 남편의 회사에서도 한두 달 월급이 늦어지고 있었다.

  생활비에 여유가 없이 살았기에 월급이 늦어지니 생활이 어려웠다. 시어머니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용돈을 십 여일 늦게 보내겠다고 했더니 시어머니는 또 싫은 소리를 했다. 그녀는 빚쟁이가 된 느낌이었다.

  시누이도 전화기 너머로 또 거들었다. 그녀 남편에게 한참을 뭐라고 하다가 ‘그러니까 누가 그런데다 집을 사래? 니 월급 니가 관리해!!!’라고 소리쳤다.

  자신의 집을 마련하기 위해 양대금을 내고 집이 완성되는 동안의 기다림은 인생의 큰 기쁨이고 행복한 기다림이다. 그 기다림이 그녀에게는 버티기였다. 욕심 많은 나쁜 여자라는 시집 식구의 비난을 견디는 것이 힘들었다.

  거의 누구와 싸움도 하지 않고 교과서 대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살아온 그녀에게 자신이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것 자체가 버거웠다. 결혼하고 그녀는 늘 시집 식구들의 공격 대상이 된 느낌이었다.

  

  남편은 눈이 착해 보이는 그 남자. 가족만을 위해 살아오며 사회생활을 10년이나 했어도 욕심 없고 아무것도 없는 그 남자였다. 뭐 더 어렵게 시작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가 그녀에게 말했던 것과 그의 직장 경력에 비해 그랬다는 것이다.

  착하기만 한 그는 그 여자에게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

  시누이와 시어머니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해. 나도 집에 할 만큼 했잖아. 그 사람에게 뭐라 하지 마세요.’ 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엄마인데 어떻게 해, 어머니 돌아가시면 당신한테만 잘할게.’

이런 말이 그녀 남편이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그녀의 친정 부모들은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만 갖고 맨몸으로 맨발로 가시밭길 위를 자식을 업고 걸어온 사람들이었다. 자식 세대가 잘 살기만 바라며 아끼고 참고 힘든 일을 하면서도 ‘너희는 잘 자라 돈 벌어서 부모에게 잘해야 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부모로서 우리는 이만큼만 해줄 테니 열심히 공부해서 너희 꿈대로 잘 살아라’라는 뜻을 보였을 뿐이고 말에 대한 책임으로 몸이 부서지도록 일했다.     

  그녀가 보고 자란 친정 부모와 너무 다른 시집의 생활방식과 모습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 힘들었다.

  남편이 좋아서 남편의 첫 생일에 시어머니 생일상을 조촐하게 차리고 잘 키워 주셔서 감사하다는 카드까지 썼던 그녀였다.

  결혼할 때의 이런저런 이야기는 생각의 차이였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착한 사람이 옆에 있고 세탁기 위에 양말을 가지런히 벗어놓은 모습조차 예뻐 보인 날들이 있었다.

  엄마 손은 약손이지만 물혹이 생기며 밤이면 배가 땅기고 아팠는데 남편이 문질러 주면 아프지 않은 것을 보면 남편 손도 약손이었다. 그런 남편이 그녀에게 소중했다.

  무엇을 물어보면 남편은 눈을 깜박이며 곰곰이 생각하고 답을 해주려고 애쓰는 모습도 좋았다.

  한 번도 누구랑 싸워 본 적도 없고 어릴 때부터 뛰어놀지도 않고 책만 읽었다는 남편은 누구라도 시키면 시키는 대로만 할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그녀 편이 아니라 남편이 될 줄은 몰랐다.     

  그녀가 결혼하고 한참 뒤에 남편의 빈 월급 통장을  건네받고 몇 개월 되지 않아 남편이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냈다. 남편이 사표 내고 몇 달 쉬는 동안 시동생 두 명이 카드빚 갚는다고 각각 몇백 만 원 씩을 퇴직금에서 가져갔다.

  남편이 재취업을 할 무렵 시어머니 치아 비용과 환갑잔치 비용이 몇 백만 원 들었다.

  시어머니의 소중한 장남에게 환갑잔치를 어디서 하는지 비용이 얼마가 드는지 아무도 의논하지 않았다. 시누이가 나도 이만큼 내니 너희도 이만큼 내라고만 하였을 뿐이었다. 잔치가 끝나고도 그 돈이 어찌 쓰였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보통 친척들 한복을 해주기도 한다는데, 거의 한 달 월급이 되는 돈을 주었건만 시집의 작은 어머니들에게 한복도 해주지 않았다.

  어쨌든 밴드까지 불러서 하는 그 성대한 환갑잔치는 훗날에도 그녀가 할 일을 했다는 안도감을 주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큰 일들이 이만큼 지나갔으면 그들 부부가 살아가도록 그대로 두어야 하지 않았을까. 결혼 비용도 벌지 않고 시어머니가 대줄 수도 없는 돈을 월급쟁이 아들에게 더 내라고 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시어머니 환갑 보름 정도 앞에 있는 첫딸의 돌이 있었다. 당시에 보통 뷔페에서 치렀지만 시어머니 환갑을 앞두고 서울에 가서 또 일가친척 모아 치르기도 번거로워서 남편이 새로 옮긴 회사의 부서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간단히 집들이로 치렀다.

그때 선물로 받은 옷을 오래도록 소중하게 입혔다.

  물론 그녀도 일을 해보고 싶어서 아이를 놀이방에 맡기고 취업을 하려 했다.

그런데 아이를 보낸 첫날밤에 아이가 고열에 경기(驚氣)를 했고 낮에 없던 멍 자국이 이마에 몇 줄 나타났다. 계단에서 찐 자국 같았다.

  어린이집에서 그냥 넘어진 줄만 알았는데 그녀가 자세히 따져 물으니 계단에서 구른 것이었다. 미리 말했으면 놀란 것 진정시키는 약이라도 먹였을 텐데, 충격이 가시지 않아 아이가 밤에 경기(驚氣)를 한 것이었다.

그렇게 놀라고 나니 마음 놓고 아기를 맡길 수 없었다. 이제 갓 돌이 지났으니 말이다.

  생활비를 아끼고 아기에게 안정된 육아 환경을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상황이니 당시에 많은 엄마들이 사는 유아용 도서도 사지 못했다.

친정어머니가 해준 남편의 금목걸이와 돌반지를 팔아 꼭 쓸 돈을 썼다.

그 돈의 일부로 아이에게 읽힐 동화 전집을 한 세트 샀다.

그녀는 그 도서를 다용도로 이용했다.

책을 한 권 읽어주고 주인공의 그림을 그려 아이가 색칠하게 하고 종이 인형을 그려 나무젓가락에 붙여서 함께 놀았다.

동화책을 읽고 책의 내용을 아이와 이야기하며 아이의 사고력과 어휘를 늘려갔다.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에게 책의 제목을 짚어가며 말과 글이 함께 학습되게 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요구르트의 이름이 쓰인 글자를 짚어 말해주니 아이가 다른 곳에 있는 같은 글자도 찾아내어 읽기에 말과 글이 함께 학습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동화책 몇 권을 바닥에 늘어놓고, ‘어머, 책이 있네’라고 말하면 아이는 곧 책을 집어 자세히 쳐다보았고 함께 읽었다.

동화책을 읽어주며 우리말의 끝에 있는 조사 ‘다’를 연필로 동그라미를 쳐가며 ‘다’라고 하면 아이도 따라서 하며 글자를 하나씩 익혔다.

그녀의 엄마 생활은 즐거웠다.

아이가 잘 토할 때를 제외하고는 아이하고 종이 접기를 하고 책을 읽어주고 봄길을 걷고 함께 어린이 연극을 보며 행복한 엄마가 되고 있었다.

큰아이가 태내에 있을 때는 주로 그녀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조용히 전공 공부를 했는데 둘째 아이가 태내에 있는 상태에서 그녀가 큰 딸에게 하는 엄마 역할이 태교가 되었을 것 같다.

큰아이는 말수가 적은 편이고 옹알이도 하지 않았고 둘째 아이는 혼자 놀면서도 흥얼흥얼 종알종알했다.

동화책에 딸려 온 동화 테이프도 규칙적으로 틀어 주었다. 그 내용이 잠재의식에 남아서 인지 옹알이도 하지 않던 아이가 인형 가게에 들어가자, 등에 업힌 채로

“야, 아름답다!”라고 소리쳤을 때는 기적 같았다.

시모에게 전화로 싫은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고 어린 딸이

“엄마, 걱정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라고 말하여 그녀는 깜짝 놀랐다.

어느 동화 테이프에서 나오던 말인 것 같은데 아이는 이 말을 쓸 상황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만 두 돌 정도 지난 아이의 말은 엄마를 감동시켰다.

둘째 아이를 가져서 피곤했지만 큰아이가 낮잠이 적어 그녀는 힘이 들었다.

출근하는 것도 아닌데 아이가 6시면 일어나 앉아 부스럭 거려  일어나야 했다.

낮잠을 거의 자지 않으니 아이는 저녁 6시면 곯아떨어진다. 그래서 저녁을 서둘러 먹여야 했다.


  시집에서는 내 아들, 내 동생이 번 돈이라고 하겠지만, 그녀도 주부로 알뜰하게 살며 남편 식사와 살림, 육아에 전념했다.

결혼 전에 해본 적이 없는 갈비찜도 잘했다. 이웃에 결혼 20년이 되어가는 아주머니에게 나누어 주었더니 아들이 좋아한다며 자신에게 양념을 한번 해달라고 했다.

본인이 고기를 싫어하는 그 아주머니는 고기만큼은 그때까지 시어머니가 해준 것만 먹었다고 했다.

친정어머니가 사준 유모차는 튼튼해서 아기를 데리고 두세 정거장 되는 곳에 장을 보러 가서 이삼만 원에 일주일 치 야채와 생선을 바구니에 담아 올 수 있었다.

그녀 집에서 얼마안 되는 거리에 백화점이 있었지만 운동 겸 절약 겸해서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번개시장을 이용했다.

그 동네서 만난 알뜰하고 부지런한 아주머니가 알려준 곳이었다.

  아랫집에 사는 그녀보다 몇 살 어린 새댁도 그녀의 새 친구가 되었다.

그녀의 딸과 동갑내기 딸을 둔 새댁, 사실 그녀도 남들은 새댁이라고 불렀다.

여름에 창문을 열어놓고 있으면 집안에서 ‘아악’하고 지르는 아이가 지르는 소리가 바깥이며 몇 층 위까지 들렸다.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이렇게 소리치는 아이 정희는 좀 소란하고 적극적인 아이였다.  

천주교 신앙을 가진 정희와 그 가족은 평온했다. 정희의 아버지가 외동아들이고 정희 할머니도 함께 살고 있었다.

  고부가 한 집에 살지만 시어머니는 시장에서 떡볶이 장사를 하고 아들은 S기업 현장직이었다. S기업 현장 직은 연봉이 높은 편이다. 정희 할머니가 굳이 장사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할머니는 자신의 일에 긍지와 책임을 갖고 일했다.

같이 살지만 장사를 늦게 마치고 오기 때문에 며느리와 함께 있는 시간도 거의 없고 아파트 관리비와 일정 정도 생활비를 며느리에게 주었다.

정희 엄마도 착하지만 할머니도 며느리에게 강요하거나 싫은 소리를 하지 않고 손녀를 예뻐하기만 한다. 정희가 짓궂게 그녀의 아이를 괴롭힌다고 하니 할머니가 애기엄마 얼마나 속상하겠느냐며 가지 말라고 했단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산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며느리도 착하고 홀시어머니 힘들다 하여도 자신의 일이 있기 때문인지 정희 할머니는 며느리를 힘들게 하는 게 없어 보인다.

고부 관계는 서로 잘하려고 해도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있기 마련인데 참 아름다운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은 교대근무를 하는 정희 아빠가 낮근무일 때 그녀 아이 ‘은빈’가 아플 때 차로 응급실에 데려다준 적도 있었다.

  2층에 사는 그녀는 1층 정희 엄마와 윗집 아주머니를 알게 되며 지방 생활에 정을 붙이기 시작했다.

때로는 힘든 그녀의 시집살이에 대한 하소연도 했다.

정희 엄마에게서 경상도 음식인 배추 전을 배웠고 윗집 아주머니와 같이 장을 보고 겉절이를 담가 먹기도 하였다.

이들을 사귀며  차츰 그곳이 익숙해졌다.  둘째 딸 출산이 다가왔다. 공교롭게도 그 동네에 같은 달 출산일인 산모를 여러 명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둘째 아이는 친구가 많을 모양이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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