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막아준 대형사고
꿈을 꾸었다. 스르르 입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온다. 손에 받아 보니 하얗고 여린 송곳니 네 개다. 놀라서 혀로 입안을 여기저기 굴려본다. 여러 개의 송곳니들이 힘없이 빠져 입안을 가득 채우고 더 이상 물고 있을 수 없어 퉤, 하고 뱉어내자 수십 개의 이가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입을 아 하고 벌려 거울을 보니 위아래 앞니 두 개씩 네 개의 이만 남아 있다. 이를 어쩌지. 더 이상 이가 빠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입을 꾹 다문채로 잠에서 깬다.
두어 번 뒤척이다가 다시 잠에 드니 장면이 바뀌어 있다. 눈앞에 돌아가신 엄마가 서 있다. 투석과 항암으로 오랫동안 물을 거의 못 마시고 음식도 늘 가려먹어야 했던 엄마의 피부는 두꺼비처럼 거칠고 겨울 낙엽처럼 말라 있었는데. 천국에서 맛있는 것도 많이 드시고 물도 매일 벌컥벌컥 마시는지 분홍기가 도는 피부가 수분으로 꽉 차 있다. 호스피스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엄마보다 살도 20 킬로그램은 더 늘어 보인다. 갑자기 엄마가 아프기 전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하와이 훌라를 준다. 엄마, 천국에서 훌라 배웠어? 내가 묻자 엄마는 웃으며 두 손으로 파도를 그린다. 꿈에서는 감각이 선택적 전지적 시점이라 꿈에서 보이는 모든 것을 보고 만질 수 있다. 귀로 들리지는 않아도 눈으로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따뜻한 체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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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 빠지는 꿈을 꾼 다음 날이면 늘 가까운 사람이 다치거나, 죽었기에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눈을 떴다. 출근 준비를 하는 남편에게 “나 이가 빠지는 꿈 꿨어. 하얗고 여린 송곳니들이 입에서 와르르 빠져서 계속 쏟아져 나왔어. 알지? 내가 이 빠지는 꿈 꾸면 꼭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거. 오늘 차 조심하고, 일찍 와.” 등교준비를 하는 딸에게도 조용히 일렀다. ”오늘 차 조심하고 길 잘 보고 다니고, 안 가던 곳 가지 말고. “
현관문을 나서는 남편을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한편으론 엄마가 훌라를 추던 모습을 떠올렸다. 꿈의 마지막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는데. 좋은 일도 생기려나?
꿈 걱정도 잠시, 딸아이가 먹고 싶다는 김칫국을 끓이고 삼치를 구웠다. 환기를 시키고 설거지를 하고 나니 금세 출근시간이다. 둘째가 막 잠에서 깨어 정신없이 아침을 먹고 태권도 방학특강 수업을 들으러 갔다. 대강 집안을 정리하고 출근길에 나서 30분쯤 지났을까, 직장에 도착하자마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저기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차랑 부딪혀서요. 아, 저는 바로 앞 커피숍에 앉아 있다가 나와서 보고 아이가 전화가 없다고 해서 바로 전화드렸어요.
심박수가 오르고 호흡이 급격히 빨라졌다. 아뿔사, 남편과 딸에게만 경고하고 아들을 놓쳤다.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상황을 물었다.
어머, 감사합니다. 혹시 아이가 옆에 있나요? 통화는 가능한 상태인가요?
엄마! 응 나 괜찮아. 자전거에서 넘어져서 좀 까지고 무릎이 좀 아파. 여기 어른들이 119랑 경찰도 불러주신대.
아이 목소리를 들으니 일단 안심이 되었지만 핸드폰을 쥔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더 꽉 움켜쥐고 엄마가 곧 가겠노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직장에 사정을 말하고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아이를 만났다. 나보다 먼저 남편이 와 있었다. 보험사와 경찰서, 사고 운전자와 통화를 마치고 정형외과로 진료를 보러 갔다. 엑스레이를 찍고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아이는 조금 놀란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꺼운 기모 바지였지만 무릎 부분에 피가 스며 밖으로 빨간 핏자국이 번졌다.
경찰은 하늘이 도왔다며 아이의 사고 현장 화면을 보여주었다. 아들이 주유소에서 나오는 차와 자칫 조금만 더 세게 부딪혔더라면 바로 앞 대로로 넘어질 수 있었다. 대로는 차들이 속도를 내는 구간이라 그다음은 상상하는 것만으로 소름이 끼쳤다. 죽음이라는 사고가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에게 생길 수 있으며 그게 우리일 수 있다는 걸 2012년의 여름에 이미 겪어본 터라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하며 뇌가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아이를 집에 데려다주고 남편과 각자의 직장으로 향했다. 한숨 돌리고 나니 그제야 온갖 상상으로 긴장과 이완을 반복한 몸 여기저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손목과 팔목이 불편하리만큼 묵직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커피를 후후 불며 길고 깊은 호흡을 한 후 다시 일을 시작했다. 다행히 일에 집중하기 시작하니 잡념과 쓸데없는 가정으로 어지럽던 마음이 조금 평온해졌다.
문득 엄마 꿈이 떠올랐다. 마지막까지 함께 방을 쓰고 온갖 잔심부름을 다 해준 손주를 지키기 위해 엄마가 얼른 와서 막아준 게 분명했다. 그래, 천국도 죽은 사람이지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 서로 그 정도는 봐줄 유연함이 있겠지. 이 정도 고생하고 슬펐으면 아래 세상에서 가족들이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살길 바라는 엄마의 간절한 청원을 신이 받아주었을 법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