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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무

이제 내 김치 걱정은 그만해 엄마

by 실버라이닝
올해는 진짜 김장 안 할 거야.


그래, 엄마. 홈쇼핑에서 파는 김치가 얼마나 맛있는데. 그 사람들이 알아서 다 좋은 재료 사서 우리보다 맛있게 만드는 거야. 올해는 사 먹자. 우리가 세일할 때 있으면 미리 사둘게.


응.


하지만 며칠 후, 퇴근 후 절인 파보다 흐물거리는 몸으로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부엌까지 들여다 놓지 못한 김장 재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치기 엄마. 그렇게 다짐을 해놓고는 집 앞 마트를 또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쪽파와 쑥갓을 잔뜩 사 왔다. 무는 가을무가 제일 맛있다며 얼마 전에 잔뜩 사서 돈뭉치처럼 신문지로 꽁꽁 싸서 베란다 한쪽 스티로폼 통에 보물처럼 보관해 두었다. 정황상 오늘 저녁이나 내일 새벽쯤이면 나 몰래 며칠 전에 주문했을 해남 절임배추가 도착할 것이다.


야, 그것 좀 여기다 갖다 놔. 무거워서 도저히 못 옮기겠더라고.



엄마, 김장 안 한다며!


내가 할 거야.


엄마가 하겠다는 말을 풀이하자면 엄마는 꼭 하고 싶으니 너는 도와야 한다는 뜻이었다. 올해도 내 목소리가 처참하게 묵살당한 사건의 현장이 현관 앞에 펼쳐져 있었다. 왜 내 의견은 매년 이렇게 가볍게 무시당해야 하는 거지? 왜 엄마가 제일 아프다는 이유로 내가 피곤한 상황은 배부른 소리가 되는 거지? 재료들을 흙이 묻은 그대로 식탁에 올려두고는 방으로 휙 들어가 버리는 것으로 내 의사를 표시했다. 부엌에서 알타리를 묶은 지푸라기를 끙끙대며 푸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내다보지 않았다. 거의 채비를 마쳤는지 거실이 조용해졌다. 나는 안 도와줄 거야. 분명히 엄마가 한다고 했어. 엄마가 한댔으니까 엄마가 해. 나 이번 주에 진짜 힘들었어. 너무 피곤해. 이번 주말엔 진짜 늦잠 자고 싶다고.


사각사각. 아휴, 텅.


새벽부터 부엌에서 무채를 썰다가 무를 집어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올 것이 왔구나. 긴 숨을 한 번 내쉬고 머리를 질끈 묶은 뒤 거실로 나갔다. 엄마가 어느새 쪽파를 다듬고 무를 씻어 채칼로 무를 채치고 있었다. 힘겹게 무를 집어든 팔엔 투석한 혈관에서 새어 나온 피로 빨갛게 물든 밴드가 잔뜩 붙어 있었다. 남편이 한쪽에서 장모님 눈치를 보며 배추를 나르는데 엄마가 나와 눈도 안 마주치고는 양파 꾸러미를 풀며 말했다.


야, 그거 좀 해. 내가 팔만 안 아프면 다 할 텐데. 진짜. 양파 좀 썰어.


안 하다며 왜 한다고 해가지고,라고 하고 싶은 말을 알약 삼키듯 물 한 모금에 넘기고 부엌칼을 잡고 양파를 도마에 올려놓았다. 어느 누구 하나 말이 없었다. 다 썰고 나니 양파와 고추를 던져주며 믹서기에 갈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렇게 매년 김장이 반복되었다. 노동은 내가 다 했지만 계획부터 진두지휘를 엄마가 했다는 이유로 나의 노고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가버리는 탓에 엄마는 김장을 안 했지만 했고 나는 했지만 안 한 딸이 되는 게 싫었는데, ‘어차피 그럴 거 내가 나서서 하면 좋았으련만‘. 엄마 없는 김장철에야 작은 한숨을 쉬며 메모같은 반성문을 내뱉는다. 겨우내 김치를 꺼내 식탁에 올려 놓을 때마다 뿌듯해하는 엄마에게 ’그래 역시 김치는 집에서 담그는 게 제일 맛있긴 해, 엄마’ 라고 말해주면 좋았으련만.




엄마 꿈을 꿨다. 김장 배추가 수북이 쌓여있는 현관에 엄마가 커다란 무를 들고 서 있다. 엄마는 몰래 왔다 가려다가 들킨 듯 살짝 놀라더니 금세 머쓱하게 웃는다. 그러고는 손을 모아 김치를 담가주러 왔다고 속삭인다.


엄마, 걱정 마. 이젠 나도 요리 잘해. 그리고 김장은 앞으로 사위랑 손자가 해준대. 그러니까 내 김치 걱정 안 해도 돼.


엄마가 ‘응, 그래. 다행이다. 하며 두 손을 모은다. 방에서 남편이 나와서 ‘어머니 걱정 마세요, 제가 잘 도와줄게요’ 하니 안심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본다. 그런 엄마에게 푹, 안긴다. 엄마가 내 등을 토닥여준다.


네가 재밌게 잘 살고 있는 거 매일 보고 있어. 너 웃는 모습 보는 것만으로 행복해.


깜짝 놀라며 천국에서 정말 내가 잘 보이냐고, 웃는 모습이 보이냐고 물으니 엄마는 그렇다고, 정말 잘 보인다고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엄마, 그 말을 해주러 온 거야? 말끝에 꿈에서 깼다.



엄마를 보낸 첫 김장철. 가을만 되면 가을무가 그렇게 맛있다고 노래를 부르던 엄마였는데. 기다리면 오지 않고 기다리지 않으면 오는 우리 동네 마을버스처럼, 엄마가 떠난 가을 나에게 그렇게 천대받던 가을무가 거실 식탁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다. 깍두기가 먹고 싶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 가을무가 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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