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잔재미양 Feb 20. 2023

오늘치 믿음

식료품 창고에서 양파를 꺼낸다. 감자도 집어든다. 방치하면 어느새 썩고 푸르러지는 예민한 채소들. 서늘한 곳에 둔 덕에 두 재료 모두 안전하다. 채칼을 꺼내 감자 껍질을 벗긴다. 양파도 숭텅숭텅 썬다. 오늘 저녁은 카레다. 아이들의 우당탕탕 노는 소리가 귓구멍을 쑤시지만 묵묵히 재료를 다듬고 프라이팬을 불에 올린다. 누가 뭐래도 오늘 저녁은 카레다.


두 아이의 방학.


놓을 방(放), 학문 학(學). 공부를 내려놓는다라. 짧은 두 글잔데 여운이 길다. 매일을 거르지 않고 매일을 나갔다. 비가 오면 비옷을 입고, 눈이 오면 눈을 만지며 어떤 날은 기운차게 어떤 날은 기어가듯, 말 그대로 '어찌저찌' 기관으로 향했다. 등굣길 곳곳에 자기 몸만 한 가방을 멘 초등학생들이 한 곳으로 향한다. 학교가 커다란 진공청소기처럼 도로에 존재하는 모든 아이들을 빨아들이고 나면 썰물처럼 매끔해진 거리에 아이의 뒷모습을 좇던 내가 서 있다.


'이것을 다들 매일매일 하고 있다니...!'

아이들을 기관에 보내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감탄했던 것 같다.


기분에 상관없이 나갈 채비를 하고 칠판을 마주했던 아이들이 석방되었다. 지난날 성실함에 대한 보상을 누리듯 아이들은 양껏 뛰고, 먹고, 엄마를 불러댔다. 인구밀도가 높으면 그만큼 부딪힘도 많은 법. 남매가 온종일 같은 공간에 놓이자 자연스레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며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작은 일에도 고성이 오가고 울음이 터졌다. 스쳤다고 으르렁 거리다 딸기 한 접시에 세상 상냥해지는 모습을 보며 정신이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BBC의 야생 동물을 다룬 다큐에도 이런 장면이 있었던 것 같은데. 닌텐도 스위치 1인 플레이로 평생 잘 놀다가 갑자기 2인 플레이로 바꿔야 하는 느낌이 이번 방학이려나. 어쨌든 인생은 팀플레이였다. 강제팀플. 방학은 섬처럼 살던 아이들의 본격 합숙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건 곧 나의 개학이었다. 눈 뜨자마자 1교시가 시작되어 딩동댕동 체육에 국어에 점심시간에 릴레이처럼 이어지는 수업. 참을 인자 삼백번 새기고 냉장고를 쥐어짜 삼시 세끼를 차리고 나면 어느덧 밤이 찾아왔다. 흑화 된 마음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그날의 성적이 별처럼 총총 떠올랐다. 화를 낸 날은 빵점, 자애로운 날은 만점을 주곤 했다.


가족이라서였을까. 피를 나누었을 뿐 기질을 나눈 것이 아니고, 기질은 나누었어도 기분이 같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붙어 있어야 하는 현실. 어떤 날은 날이 좋아, 어떤 날은 날이 궂어 파도타기 하는 감정들이 맞지 않는 주파수처럼 부딪혀 잡음을 빚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의 다큐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작업할 때 자신은 매우 예민하고 짜증 많은 사람이 된다고. 그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이렇게 장소를 바꾼다며 외딴 바닷가 마을로 떠나 버린다. 거기에서 러닝셔츠에 잠옷바지 차림으로 카메라를 향해 자신을 내버려 두라며 담배를 뻑뻑 피는 그가 너무 부러웠다. 작업과 육아의 비중을 저울질해야 했던 그해의 방학은 나를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습으로 만들었다. 온종일 사람을 곁에 두고 작업을 한다는 건 이런 내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감자 깎기와 커피로 다스리던 마음이 바닥날 방학이 절반쯤 지났을 무렵 남편이 등을 떠밀었다.


"조금 일찍 퇴근할게. 어서 나가."


출판사와의 계약을 앞두고 있었다. 아이들의 고성 사이에서 틈틈이 쓰고 그렸지만 낙서 몇 장 끄적인 채 식사 시간이 돌아오곤 했다. 숟가락으로 긁어 만든 구멍을 발견한 죄수처럼 작업보따리를 꾸려 집 근처 카페로 달려갔다.


아- 이 쾌적함. 이 안락함!


사람이 풍경이 되고 나 역시 그 풍경 속 무존재가 되는 편안함이라니.

손을 떠난 작업이 찰떡같이 달라붙을 리 없지만 외딴섬처럼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성이 차올랐다. 종이에 연필 스치는 소리는 또 얼마만인지. 그 어떤 연주도 이보다 감동적일 수 있을까. 한껏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차근히 작업을 살펴본다.


그간 출판사와 나눈 대화, 미팅의 풍경, 이 장면을 그릴 때의 마음, 작은 디테일들이 스쳐 지나간다. 신기한 일이다. 흡사 주마등을 마주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죽어가던 작업물들이 나에게 보여주는 잔상, 같은 것이려나. 괜스레 애틋해져 종이를 쓰다듬는다. 두고 온 마음들이 표면 위로 떠오른다. 그림들은 나를 이렇게 기다려주고 있었는데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는데 이야기는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었는데.


어느샌가 육아의 알고리즘에 말려든 나의 전화창에는 매일같이 오늘을, 육아를 침착하고 알차게 보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보고 싶지 않아도 내 눈에 쑤셔 박히는 그들의 하루, 내 아이의 골든타임, 그리고 그것을 놓쳤을 때 겪을 수밖에 없는 낭패스러운 상황. 가장 긴 호흡으로 지켜봐야 하는 순간들을 찰나라는 인식에 가두어버리는 논리들에 나도 모르게 휘둘려 마음의 뿌리를 찾느라 바빴다. 나의 아이들은, 나의 작업은, 그렇게 단시간 누군가의 판단으로 결정되어 버리는 것들이 아니었음에도.


남편이 재미있는 얘기를 건넨다. 십여 년 전 지인과 꾸리던 사업이 있었는데 자신은 다른 일을 찾고 그 인연은 어찌 되었는지 소식이 끊긴 채 살았더란다. 그분을 최근 일 때문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고. 듣고 보니 나도 드라마에서 협찬으로 본 회사다. 엄청난 규모로 사업을 키웠다며 남편이 상기된 얼굴로 반추한다.


"그때 그 사람이 계속하던 말이 있었어. '나는 꼭 이 게임을 내고 말 거야'라고."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생각의 물꼬가 트일 때 노력하지 않아도 그쪽으로 주변의 화두가 모이는 순간이. 다큐 속 미야자키 하야오도 비슷한 언어를 썼던 것 같다.


'스토리보드는 나올 것이다.'

'힘든 시기지만 우리는 우리의 작업을 할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어떤 믿음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을까. 언어로 빚어지지 않은 마음이 증발해 버리듯이 형체 없는 자신감은 결론 없는 이야기처럼 방황이 야기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복습도 없고 예습도 없는 방학을 보내며 틈나면 식료품 창고에서 재료를 찾아 다듬었다. 멀쩡한 재료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하면서. 여기가 인도냐는 불평을 뒤로하고 카레는 옳아라고 읊조리며. 감자를 다듬는 손길 틈으로, 싱크대 물기를 훔치는 꼼꼼함 속에서 조금씩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이 카레는 맛있어질 것이라는 믿음. 며칠째 같은 요리지만 아이들이 건강하게 클 것이라는 믿음. 주문은 때론 먼 길을 가기도 한다.


나의 하루를 내가 망치지 않겠다는 믿음.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모양을 하더라도 나를 사랑할 것이라는 믿음.


피할 수 없는 일상을 영위하기 위한 간절함에서 우러나온 마음이었겠지만 하루라는 우물은 깊고 매일 길어 올려야 하는 믿음은 생각보다 묵직하다. 방학은 여전히 진행 중인 데다 우리들의 합숙은 아직 갈길이 멀었다. 바닷가 마을은 고사하고 가끔씩 짬 내서 남편의 도움으로 집 앞 카페로 탈출하는 게 유일한 일탈이겠지만 오늘치 카레에 쏟던 마음의 방향을 돌려본다.


집에 돌아가기 전에 이 글은 마무리될 것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책은 나올 것이다.

계속, 계속, 작업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새집의 새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