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자나무가 하나 둘 셋, 나보다 몇 배나 큰 키로 나를 둘러싸고 있다. 바닥에 떨어진 대추들이 발치에 걸린다. 슬리퍼를 툭 툭 벗자 누군가가 나에게 구명조끼를 입혀준다. 보들보들 세무로 된 재질의 다홍색 구명조끼. 옆에서 친오빠가 울트라마린색 조끼를 걸치고 있다. 머리부터 뒤집어쓰면 양 옆 구멍으로 두 팔을 빼고 허리께에 엉켜있는 두툼한 끈을 조이기 시작한다. 착 착 착.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스칼렛 오하라가 행사에 가기 전 코르셋을 조르는 장면을 떠올린다. 겨드랑이 밑부터 조여 묶어주고 등쪽에 있는 구멍으로 바람을 넣으면 봉봉하게 부풀어 오른 조끼가 내 가슴을 조여 온다. 준비 완료.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구명조끼. 큼직한 돌바닥. 널찍한 수영장. 파란 하늘 사이에 빼꼼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야자나무들. 깊이가 다양한 수영장이 아니었던지라 어린 친구들은 구명조끼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안전요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인들끼리 누군가의 수영장에 놀러 갔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사우디라는 나라에서 헤엄쳤던 수영장의 기억.
어느덧 놀다 보면 조끼가 물에 부력 때문에 밀려 살이 쓸린다. 간식을 먹으려고 물 밖으로 나가면 팔이나 옆구리가 여기저기 빨갛다. 물을 무서워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무서워하지 않았던 기억부터 시작되니까. 첨벙첨벙 잘도 뛰어들어갔다. 차갑게 나를 감싸던 기억. 마치 커다란 젤리 속에 나라는 이질적인 물질이 섞이며 어우러지는 것만 같았던 느낌. 조끼를 벗겨달라고 요청했던가. 내가 아파 보여 벗겨주었던가. 엄마와 아빠가 어디 계셨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조끼를 벗고 수영장 구석의 사다리를 잡고 천천히 물에 들어간다. 차가운 감촉도 금세 잊히고 나에게 덧대어져 있던 조끼가 사라졌다는 해방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손을 떼고 팔다리를 휘젓다가 가라앉을 것 같으면 다시 사다리를 잡고. 다시 휘적거리다가 사다리를 잡고. 어렴풋이 이런 나의 소극적인 시도를 안타깝게 여긴 큰오빠가 이렇게 이렇게 수영하는 거라고 다그치는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리는 듯하다. 구명조끼를 벗던 날.
지금처럼 놀이시설이 갖추어진 수영장이 아니었다. 미끄럼틀도,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살도, 파도도 없는 그런 곳. 넓고, 깊고, 자유로웠다. 거기서 하나하나, 내가 물속에서 하고 싶은 걸 깨쳤다. 수영은 이런거라고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구석에서 철사다리만 붙잡고 있어도 괜찮았다. 나처럼 수영이 처음인 어린아이들이 머리만 내민 채 물 속에서 웅성웅성 사다리를 붙잡고 떠 있다.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 숨소리까지 들린다. 똑 똑 똑. 물 떨어지는 소리. 물이 고이는 소리. 흡사 동굴같은 구석. 그러다 한 아이, 한 아이, 사다리를 놓고 수영장 테두리를 붙잡고 이동한다. 어린 까치가 둥지를 벗어나듯, 천천히 천천히 순서를 지켜가며. 멀어지는 아까의 동료를 바라보며 남아있는 어린 새들도 비장해진다.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수영장 중앙은 큰 아이들과 어른들이 무차별 다이빙을 하느라 물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펑, 펑펑. 수영장 모서리 구석은 물소리가 가장 가깝게 나기도, 부유물이 고이기도 하는 곳이다. 커다란 수영장 속 다른 세계.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나는 구석 자리에 옹기종기 모인 어린 까치들이 조금씩 용기를 내 둥지를 떠나는 곳.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나는 누웠다. 물속에 누워 파란 하늘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살며시 손을 놓고 온몸에 힘을 뺀다. 나는 저기 둥둥 떠다니는 낙엽이요, 벌레다,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잠수도 제대로 못했던지라 누우면서 목과 귀에 물이 닿자 흠칫 차가움에 몸에 힘이 들어간다. 물이 귀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자 다음으로 어깨, 가슴 순서대로 물 속에 놓아준다. 팔이 해파리처럼 떠오르고 마지막으로 두 다리를 물에 맡긴다. 두둥실. 그날 본 파란 하늘은 지금도 기억난다.
물에 떠 아래를 내려다보면 일렁이는 물속에 내 몸이, 내 두 다리가, 그리고 손에 닿을 것만 같은 수영장 바닥이 보인다. 발을 휘저어 어디까지가 바닥인지 확인해 본다. 닿지 않는다. 발을 세워 까치발 모양으로 조금 더 내려본다. 닿지 않는다. 엄지에 온 감각을 모아 밑으로 밑으로 가늠하다 보면 내 목이 잠기고 턱이 잠기고, 볼이 잠기고 어느새 콧구멍에 수면에 닿아있다. 에라 모르겠다 눈을 질끈 감고 물에 들어갔다 나온다. 푸하.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다시 한번 들어가 본다. 숨을 참는 것도 해볼만 하다. 다음엔 잠수한 채 눈을 떠본다. 아래 세상이 펼쳐진다. 요새 끼기 시작한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처럼 물 밖 소리가 웅앵웅앵 뭉친 채 귓가에 맴돈다. 내친김에 사다리를 붙잡고 내려가기 시작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내가 처한 물이 생각보다 깊었다는 약간의 공포, 그걸 확인한 기쁨, 생각보다 물속은 평안하다는 안도감이 한꺼번에 밀려오며 처음으로 바닥을 만져본다. 공기방울을 하나 둘 내보내며 고개를 들면 하늘이, 사람들의 몸이 보인다. 찬란한 첫 잠수의 기억.
나는 아직도 이 기억으로 산다. 마치 나는, 수영장 밑바닥을 어루만지고 있고 세상이 저 멀리 저 높이 내 시야에는 있지만 손에는 닿지 않는 것처럼 펼쳐져 있다. 뽀얗고 밝은 저곳이 언젠가 이 깊고 긴 잠수를 마치고 나면 올라갈 수 있는 수면처럼 조급함에 숨 막히고 가끔은 그립다. 내가 가진 천성적인 불완전함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나뭇가지에서 이탈해버린 나뭇잎처럼 동동거릴때면 생각한다. 아, 나는 또, 그 수영장에 왔구나 하고.
마음을 저 깊은 곳, 일렁이는 물속으로 보내고 보면 밑바닥을 궁금해하던, 내가 처한 깊이를 알고 싶어 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사방이 물에 휩싸인 이 장마철, 나는 물속에, 그날의 수영장 속에 있다. 헤엄치고 탐험하고, 호기심 어린 까치발을 바닥에 내린 채 숨을 참고 있다. 수면 위 깔깔 거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저 너머에서 메아리치는, 나는 지금 수영장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