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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재미양 Aug 30. 2023

식육아

무난하게 초록빛을 띠던 화분들이 시들해졌다. 자꾸 고개를 숙이고, 물렁해지고, 시커멓게 색이 변했다. 결국 이렇게 되었네. 꼭 내 모습 같다. 뭐든 겨우겨우 해냈던 것만 같던 올여름. 오염수가 바다에 버려지고 하루가 멀다 하고 살인이 일어나고 애용하던 SNS는 종말 위기에 놓여있었다. 분위기에 침잠된 것이리라. 겨우 겨우 일어나 그날의 살림을 꾸리고 뭐든 해야겠기에 움직이고 연명하듯 먹고, 낙서 같은 그림들을 끼적였다. 그리고 자주 누웠다. 반려식물도 주인을 닮는 걸까.


이사한 집은 식물이 잘 자랐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 공간에 식물이 생존하다니! 구불한 모양이 예뻐서 데려 왔던 피시본도, 하늘거리는 보스턴고사리도 빠르게 죽여버린 이전 집과는 다르게 이곳은 어디에 내버려 두어도 새 잎을 피웠다. 집들이 선물이었다. 가격도 있고 색도 고왔지만 곧 죽겠지, 심드렁하게 물만 채워줬는데 내 무심함에도 쑥 쑥 자라더니 튼튼한 뿌리를 내보이며 오히려 나를 불러 세웠다. 황량하던 회색집에 초록이의 존재감은 컸다. 오며 가며 저절로 눈길이 갔다. 나이가 들면 식물이 좋아진다던데 나도 그랬나 보다. 작은 노력에도 잘 자라주는 초록이들을 보자 신이 나 몇 개를 더 데려왔다. 흙을 주문하고 새 화분을 골랐다. 작은방 옆 베란다에 본격적으로 화단도 꾸몄다. 항상 이렇게 일을 벌인다.


부쩍 첫째와 부딪히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탈없이 차분하게 크던 아이였는데 짜증도 늘고 가슴에 대못 박히는 표현도 쓰기 시작했다. 놀아달라 소리가 없어진 지는 오래. 그나마 타협을 본 체스라던가 보드게임은 놀이에서 진 아이의 분노로 마무리되곤 했다. 게다가 항상 추레하고 어딘지 모르게 눈에 거슬렸다. 운동화는 왜 저렇게 낡은 거야. 앞머리 좀 자르게 해 주지. 며칠을 궁리하다 그동안 너무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는 뜬금없는 깨달음에 아이 물건들을 주문했다. 도착한 물건을 본 아이는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입으로는 환호를 발음하면서 그날, 다음날, 그다음 날에도 새 옷이나 운동화를 꺼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맛있는 밥이라도 먹이자. 닭육수를 진하게 우린 미역국을 끓였다. 육수와 미역을 팔팔 끓여 깊은 맛을 내고 닭가슴살을 잘게 찢어 고명으로 얹어준다. 토마토를 몇 분 간 삶아 껍질을 벗기고 올리브유와 소금, 발사믹, 후추, 꿀과 버무린 토마토 마리네이드도 곁들였다. 말린 표고와 멸치를 간 가루를 넣은 계란말이에 간장과 물엿을 여러 겹 발라 구워낸 참치주먹밥까지 식판에 정갈하게 담는다. 만족스럽게 먹을 줄 알았지만 식판을 본 아이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어김없이 올라오는 불만. 덩달아 나도 아이에게 잔소리를 한다. 마찰은 여전했다. 이게 아닌데. 뭔가 해보려고 하면 어그러지는 모습이 딱 우리 집 식물들과 나의 관계 같았다. 섣불리 들인 그 예쁘고 싱싱했던 이파리들이 내 관심을 받으면서부터 망그러지는 것처럼.


애써서 뭔가 해줄 때의 마음이 탁하다는 걸 그 무렵 알게 되었다. 생각보다 순수하지 않은 뒤엉킨 마음. 위하는 손길 속에 깃든 상대에 대한 기대감은 선의라는 포장에 가려져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변화가 보이면 흥이 난다. 아이도 식물도 눈에 띄게 자라다 보니 내가 뭐라도 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었나 보다. 그간 무탈하게 커주었던 건 스스로들의 기질이 무난했던 것뿐, 내 노력은 아니었던 것이다. 뭐든 과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자주 우는 하늘. 숨 막히는 공기. 변덕스러운 날씨에 애써서 끌어올린 의욕에 첫째와는 조금씩 소원해지고 새로 주문한 식물들은 차분하게 죽어가기 시작했다.


쳐지든 벌레가 끼든 반응을 보이던 다른 식물들과 달리 유독 한결같던 식물이 있었다. 커지지도, 새 잎을 틔우지도 않고 몇 달을 그대로였다. 원래 작은 키에 물방울처럼 동그란 잎사귀들이 여러 갈래로 폭발하듯 피어나는 모양새인데 이건 길쭉하고 갈색인 줄기 꼭대기에 잎 몇 개만 보였다. 한마디로 볼품없었다. 그 몇 안 되는 이파리마저도 형광등 아래, 베란다 그늘,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드는 거실, 서늘한 복도, 촉촉한 화장실, 온갖 곳에 옮겨 다니며 다 떨어져 나갔다. 결국 엄마에게 파양 했다. 엄마에게 맡기면 잘 자라겠지 예상했지만 그곳에서도 여전했다. 식물이 새 잎을 틔우지 않는다는 건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거란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화장실 구석에 두었다. 아무도 보지 않고 관심을 주지 않는 곳에 내버려 두고 신경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식물은, 천덕꾸러기처럼 키워야 해."


그렇게 말하는 엄마도 사실은 식물앓이를 꽤 했다고 알고 있다. 사우디에서 귀국하며 잘 싸서 한국에 옮겨 심었던 석화. 애지중지 금이야 옥이야 돌봐 마른 인삼처럼 볼품없던 줄기에서 잎을 피워냈는데 계단에 잠깐 비 맞히러 내놨던 걸 누군가 들고 갔다. 그렇게 홀랑 사라져버릴 거, 너무 간신히 살려냈다고 허탈함에 며칠을 속상해했다고 한다.


신경 쓰이는 자식을 아픈 손가락에 자주 빗댄다. 손가락은 평소 의식 없이 쓰다가도 종이에 베이거나 가시래기라도 생기면 자꾸 의식한다. 가만 두지를 못하는 것이다. 삼 형제의 둘째가 그렇고 느리거나 모난 성격으로 태어나도 그렇다. 뭔가 해줘야 할 것 같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관계가 소원해진 건 비루한 저녁식사 때문도, 부족한 대화 때문도 아니었을 텐데. 물을 덜 주어서도, 더 주어서도 아니었을 텐데. 아니, 애초에 소원하긴 했던 걸까. 그런 관계만이 관계일까.


화장실 구석에 자리 잡은 지 두 달째 되는 날, 앙상하던 줄기에 연둣빛 싹이 여러 개 돋아났다. 여느 때 같으면 당장 자리를 옮겨주었겠지만 나머지 식물들과 합류시키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누른다. 조용히, 소란스럽지 않게 뿌리를 내렸음을 축하해 주며 가만히 화장실을 나왔다. 현관에 나가보니 아이가 어제도 골랐고 그제도 입었던 옷을 또 꺼내 입었다. 여름 내내 이 옷이다. 입을 벌리기 전에 눈길을 돌린다. 그늘에 모른 척 내버려 두고, 잊은 듯 살고, 가끔 들여다보아 안부를 묻는 관계. 식물이 알려주는 사람의 거리 같은 것. 거기서 오는 편안함. 가족도 마찬가지다. 부모는 자식의 태양이 아니라 그늘임을 자주 잊는다. 앞에서 끌어주거나 뒤에서 밀어주는 원동력이 아니라 그저 편하게 머물다 가는 어느 익숙한 구석인 것임을.


작고 손이 많이 가고 자람이 더딘 사람. 뚝심 있게 뿌리를 내려 요즘 같은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 모두가 밟고 지나가는 단지 내 흙밭이나 인적이 드문 시골길 언저리에서 자라나는 잡초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형광등 아래 나 같은 극성이면서도 시선이 뜨거운 누군가에 의해 이리 옮겨지고 저리 분갈이를 당하는 아이들도 있을 테다. 괜스레 나의 육아를, 나의 사는 모양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식물이 좋아졌다. 어느새 그 닮은꼴을 하루 한 번은 꼭 바라보게 되었다. 손바닥만 한 자리에 자기만의 생태를 간직한 식물들. 자칫 같은 공간에 놓였다고 동일한 취급을 당하기 쉬운 각각의 생명들을 그 자리 그 모양으로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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