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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재미양 Feb 19. 2022

표지 만드는 사람

연남동 골목 노란색 벽이 어여쁜 작은 서점에 전시회가 열렸다. 참가자는 두 사람이었고 한명은 연습장을 전시했다. 누구든 와서 책을 훑어볼 수 있었다. 일주일의 기간이었던가. 소규모 전시가 끝나고 너덜너덜 떼가 탄 공책들이 내게 돌아왔다. 누군가가 작업을 만져보고 살펴봐 준 것이다. 나의 제본 책들이 세상에 나왔던 유일한 기간이었다.


반듯한 하얀 종이보다 울퉁불퉁 짜깁기한 표면이 매력으로 다가 온 어느 날, 나는 연습장이 필요해서가 아닌, 표지를 칠하기 위해 제본을 하기 시작했다. 목적이 없는 단지 순수하게 뭔가 '그냥' 했던 놀이였다. 스타일도, 재료도 제각각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가장 많은 재료를 탐색했던 시기다. 화방에서 낑낑거리며 마음에 드는 내지를 사다가 괜히 자르고 이어 붙이면 드디어 고대하던 표지를 그릴 차례다. 어떤 날에는 표지를 먼저 그렸고 또 어떤 날에는 습작을 먼저 시작하고 나중에 불현듯 표지를 칠하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수작업을 좋아한다. 직접 이어 붙이는 실과 종이의 질감과 재료가 만나 어우러지는 느낌, 나도 모르는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것만 같은 신비함. 필름 카메라 너머 시선이 어떻게 담길지 모른 채 셔터를 누르는 것과 흡사하다. 손을 덴 모든 작업들은 나를 전혀 새로운 질감과 느낌으로 인도했다.



‘40’이라고 적힌 연습장이 마흔번째 제본이었다. 마흔개나 되는 작고  제본을 거친 것이다. 가끔 연습장들을 모조리 꺼내 바닥에 펼쳐놓고 나만의 전시를 한다. 그리고 자뻑(?)한다. 나와 함께 조금씩 늙어가는 만져볼  있고 훑을  있는 물질에 대한 순수한 만족감을 느낀다.


기회가 된다면 제본을 다시 하고 싶다. 글과 그림을 병행하다 보니 손맛(?)을 낼 시간이 부족했다. 제본은 바늘과 실과 가위 그리고 송곳이 필요하니 멀어진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물감을 덧입힌 후 말려야 하는 콜라주 작업이나 도톰하게 입혀 마르길 기다려야 하는 아크릴 물감도 같은 의미로 쓸 수 없다. 여느 화가들처럼 아이들이 재료와 뒹굴게 두고 싶은 마음과 그 뒷감당을 해야 하는 연약한 내 체력 사이에서 고민하다 하루가 간다.


그럴 땐 이렇게 옛 작업을 훑는다. 집안 어딘가 상자 속에 갇힌 연습장들이지만 이렇게 기록을 보는 것만으로도 하나하나 느낄 수 있다. 정말 즐거운 작업이었다. 또 한 번 아무 의미 없이 그저 그 행위로 충분히 만족하며 쓸모없는 연습장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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