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금요일마다 정동에 간다. 집에서 지도를 찍어보면 걸어서 30분이 나오는 거리. 비탈길, 숲길, 구불구불 이어진 마을버스 다니는 길을 지나면 상가가 연이어 나타나고 종로 특유의 키 큰 나무들이 머리 위를 채우는 곳. 보호수를 지나, 북적거리는 노천 카페를 지나, 유서 깊은 중고등학교를 지나면 일제강점기 시대 지어진 건물이 나온다. 아이는 여기서 작업을 하고 있다. 집 근처 학원들이 편해도 굳이 여길 오는 건 처음 이곳을 걸은 날 기분이 좋았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랄까. 나는 여전히 공간이 주는 인상을 믿는다. 좋은 공간은 좋은 마음이 스며든다 믿으며 수업을 핑계로 일주일에 한 번씩 이곳으로 온 지 세 달째다.
첫째가 스스로 앉기 시작하면서 고대하던 게 있다.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것. 새벽에 깨 수유를 할 때도 부엌 바닥을 온몸으로 쓸고 다닐 때도 줄곧 걷기만을 기다렸다. 산책이 특별해서라기보다 나의 일상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나와 아이의 유일한 접점 같은 것이었달까. 자연스레 나의 영역과 겹치다 보면 언제고 동등하게 문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멀리는 못 가더라도 틈틈이 집 근처 카페나 공원을 들락거렸다. 단골 마트나 카페에 가서 사탕을 받기도 하고 어떤 날엔 우유를 얻어 마셨다. 오뚝이처럼 뒤뚱거리면서도 가자고 하는 곳에 가고 위험하다 싶으면 스스로 멈추며 나와 걸음을 맞춰준 덕에 동네는 아이와 나의 추억으로 채워졌다. 킥보드를 타며 내달리던 어린이집 내리막길부터 밤마실 다니던 카페거리까지.
모든 산책이 순순하지 않다는 건 둘째가 깨우쳐줬다. 산책의 합이 맞는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둘째는 잡는 족족 손을 뿌리치고 자동차가 오던, 사람이 다가오던 눈에 들어온 흥미로운 것을 향해 돌진했다. 영문 모를 떼를 부리고 걷기를 거부하거나 도로변에 서서 자동차 지나가는 걸 구경했다. 이유 없는 산책이, 말없는 걷기가 아이들에게 매우 지루한 행위라는 걸 그때 알았다. 단지 첫째가 매우 협조적이었을 뿐. 이제 커버린 첫째도 엄마의 사심 가득한 산책에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작업은 하고 싶지만 걷기는 싫다, 택시를 타자, 버스를 타자, 제의가 쏟아졌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어딘가로 향한다는 게 부담스러웠던 걸까. 호기롭게 출발하다가도 다섯 걸음 떼고 힘들다고 말하는 아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기에 묵묵히 앞서 걷는다. 등 뒤로 아이가 외친다.
"우리 이야기할까?"
이야기랄게 별거 없다. 옛날 옛날에 싫어 사자가 살았는데 온종일 싫어 타령을 하다 봉변을 당해 좋아 사자가 되었다는 뻔한 이야기부터 교훈이라는 조미료를 왕창 넣은 이야기까지 되는대로 읊는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또 해줘!"를 외치면 "이젠 네가 이야기해봐." 하며 요령껏 피한다. 고르지 않은 숨 너머로 이야기 다섯 편 정도를 주고받으면 정동길에 도착한다. 오르내리던 길이 끝나고 드디어 평지다. 그제야 질질 끌던 걸음이 가벼워지고 잰걸음으로 내달리며 아이가 외친다.
"우리 이야기하니까 벌써 이렇게 왔다!"
그래, 시간은 잊으면 빨리 흐르더라.
그간 나의 산책이 지루하지 않았던 건 머릿속에 이야기가 흐르고 있어서였다.
산책을 하면 걸음에 맞춰 풍경이 느리게 흘러간다. 나아가고 싶으면 나아가고 그 자리에서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산책. 마치 책 읽기처럼 풀을 읽고, 다른 보폭으로 지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읽고, 날씨가 어떤지, 내 피부가 무엇을 좋아하지 몸의 언어를 읽는다. 산책, 그게 뭐 어렵다고. 그런 내 발등에 천근만근 무게가 실린 것 마냥 걸음을 떼기 어려운 날이 있었다. 산책의 이로움조차 부담으로 다가오던 때. 내게 좋은 것보다 해로운 걸 많이 하던 때. 집 밖에 나왔는데 막막하고 시작도 전에 길을 잃은 기분에 휩싸인다. 두 다리가 미리 겁을 집어 먹고 도로 들어갈까 생각하는 것이다. 대부분 저만큼 가야 한다고 생각할 때였다.
오르막길은 가야 할 길을 가늠하는 마음의 무게로 가득 찬다. 마감이 정해지면 시작이 부담이듯, 목적지를 설정해놓으면 첫걸음이 제일 힘들다. 넘어야 할 산등성이가 재촉해서 힘들고, 지금 내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까 힘들고, 이걸 언제 다해 시간은 계속 흐르면서 내 등을 떠미는데- 시계 면적이 초침에 의해 줄어드는 걸 목격하는 것도 힘들다. 꾸역꾸역 토하듯 적어놓은 글이 반갑지 않은 건 나의 위대함을 모르기 때문. 주변에서 아무리 칭찬해줘도 마음이 바닥에 눌어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칭찬은 원래 고래도 춤추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300년을 넘게 산 고래들이 그의 반에 반의 반도 살지 않은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붙박이처럼 들러붙은 마음으로 중얼중얼 이야기를 읊다 보면 몸이 움직인다.
조금씩의 힘. 한걸음 한걸음의 힘.
책처럼 펼쳐진 산책로에 기록처럼 남은 내 발자국을 읽는다. 바삭바삭 낙엽길에, 누군가의 흔적이 남은 흙길에, 눈 덮인 하얀 갓길에, 많은 이들이 오르내린 산길에도 무수히 쌓인 걸음과 생각들. 도무지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첫 문장만 스무 번 읽던 밤, 결국 책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읽었다. 하얀 천장의 구석을, 날벌레가 모인 등불의 내부를, 내 몸뚱이가 놓인 곳에서부터 닿는 모든 구석구석을 읽었다. 내가 남기는 숨소리를 들었다.
산책길 풍경이 벅차면, 고개를 숙여 지나온 내 발자국을 읽는다. 책장을 넘기듯, 조금씩 발걸음을 옮긴다.
사는 게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또 그렇지만도 않다. 대단하게 살려고 태어난 걸까. 대체 언제부터. 어떤 하루는 겨우 빨래 다섯 번 돌리면 끝나고 끼니 준비 한 번으로 온몸이 소진된다. 연이어 시간을 빼앗기다 보면 원래 하던 것에서 멀어져 있다. 원래 그런 것이다. 멀어진 것이 아깝겠지. 괜스레 소중해져 버리고. 한데 괜찮다. 지금껏 걸어왔으니까. 걸어온 길에는 이야기가 있다. 분명 나의 지리한 산책에, 하루에 좋은 말동무가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