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넷플릭스에 보건교사 안은영이라는 드라마가 나왔을 때는, 평소처럼 핸드폰을 켜고 침대에 누워서 밤새도록 낄낄거릴 좋은 콘텐츠 하나가 나왔구나 싶었다. 넷플릭스에 볼 게 없다고 칭얼거리던 찰나였으니 몰입해서 내 시간을 쓰레기통에 버려줄 오락 드라마의 오픈 소식은 두 팔 벌려 만세를 외칠 일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회사에서 너무 가치 있고 중요한 일들을(내 딴엔 그랬는데) 8시간 동안 하다 보니, 남은 내 시간은 좀 덜 가치 있게 쓰고 싶었다. 심지어 현대의 영웅에 대한 이야기라니. 대단히 마블스럽지 않은가.
그렇게 밤을 새워서 보고 나니 이 드라마는 오락거리 드라마라기엔 기묘한 거슬림들이 있었다. 왜 그렇지. 연출 때문인가. 하고 감독을 찾아보니 이경미 감독님이 떡 하니 나오는 것이었다. 이경미 감독님의 "아랫집(2017년 작)"이라는 영화를 정말 감명 깊게 본 터라, 그 특유의 현실을 비꼬는 연출과 시니컬함이 머릿속에 이경미라는 이름 세 글자로 박혀있었는데. 보건교사 안은영이라는 드라마가 이경미 감독님의 작품이라면 오락으로 끝나지 않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설명은 부족하지만 그것에 대한 느낌이 나에게 거슬림으로 다가온 것이겠거니 했다.
2017년 作. 이영애가 주연을 맡은 이경미 감독님의 <아랫집>. 추천한다.
영화를 먼저 본 후 책을 읽고 내린 한줄평은 "아! 드라마는 이경미 감독의 독후감이었구나!"이다. 이경미 감독이 해석한 대로 캐릭터의 성별을 바꾸고, 생략하고 강조한 모든 장면들이 책을 통해 비교되면서 더욱 흥미진진해졌다. 그리고 책으로 온전히 설명된 모든 싸움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뒤쪽의 서술에는 내가 주목한 보건교사 안은영의 감탄할만한 지점들이 있으니 스포를 바라지 않는다면 돌아가길 추천한다. 아래 내용을 보지 않더라도 책 값 하는 책이니 꼭 읽어보시길 추천.
하드커버 책은 책을 받자마자 겉의 표지를 걷어내버리는 습관이 있다. 위의 책 표지 위에 종이로된 표지가 하나 더 있었음을 미리 말해둔다.
안은영은 폭력의 세계 속에서 안은영이 되었다.
안은영이 사는 세계는 대부분이 폭력이고 욕망이며 상처 입은 마음과 영혼이 살아 움직이는 세계다. 인간 속에서 생겨난 젤리 같은 '그것'들은 누군가의 아픔과 상처, 위험이 된다. 안은영은 원하지 않는 능력을 타고나 어쩔 수 없이 그 세상 속에 살게 되었다. 은영에겐 젤리가 넘쳐나는 세상은 폭력이 넘쳐나는 세상이었고, 그 속에서 친절함으로 무장하고 치열하게 싸워나가는 그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남들에겐 허구, 거짓말쟁이인 안은영은 영웅이지만 그를 칭찬해줄 신은커녕 보호해줄 영웅도 없었다.
그런 은영이 자신을 지킬 거짓말을 만들어준 사람은 그의 친구 강선이다.
꿈을 가진 소년 강선은 친구의 불행을 '맞서 싸워 반드시 이겨낼 소년만화 속 악당'으로 설정했다. 코믹, 액션, 발랄을 콘셉트로 하는 소년 만화 속 주인공에게 상처는 더 높은 경지를 위한 장치일 뿐이고, 악당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할 반드시 죽어 사라지는 소재에 불과하다. 은영에게 젤리는 가혹한 현실이고 고통이었지만 강선의 말 한마디는 은영의 인생을 허구로 설정해 은영이 자신을 속여낼 방법이 되었다.인표를 만나기까지 은영은 절망에 빠질뻔한 순간마다 선과 허구를 무기 삼아 악을 지르며 살아낼 수 있었다.
인표는 타고난 보호막을 가졌다.
또 다른 주인공인 인표는 그는 한쪽 다리를 저는 불구지만 인표는 은영에게는 특별하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만지면 힘이 나고, 계속 손을 잡고 싶은 사람. 특히 은영이 보기에 인표는 은영이 갖지 못한 타고난 보호막을 가지고 있었다. 현실의 폭력으로부터 모든 걸 방어할 단단한 보호막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보호막은 세상의 폭력에 단정히 버텨낼 수 있는 그가 가진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었을까. 풍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은영에겐(직장도 계속 옮겨야 하는 은영이었다) 무적의 능력 같은 것이었다. 젤리를 보는 은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꽃무늬를 좋아하는 은영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은영을 유일하게 상처 받은 사람으로 이해하고 정처 없이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흔들리는 은영을 삼각대처럼 받쳐줄 단정한 사람이 그다.
우리는 은영과 인표와 다르지 않게 폭력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일반이다.
하지만 현실의 그는 결국 상처 받은 영혼에 지나지 않는다. 학교 이사장 손자지만 누구에게든 조롱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진 그는 결국 폭력 속에 살아가는 일반의 우리와 같았다.
학교에서 사건이 일어난다. 학교 사람들이 '이상해진' 것이다. 학생끼리의 동성애를 더럽다는 이유로 집단 구타하고, 장애가 있는 학생을 선생들 모두가 담당하지 않으려 했으며, 회식자리에서 성추행 사건이 일어난다. 인표는 이런 것들이 '바깥'에서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을 향한 혐오와 폭력이 추동질 당하는 상황에 인표 또한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이 뒤에서 그의 기울어진 걸음걸이를 따라 하며 조롱한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튼튼한 보호막을 가졌지만 역시나 폭력에 내던져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 모든 일들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사고들이다. 기자들이 9시 뉴스의 메인 소식으로 전하지 않을 만큼 평범하고 익숙해진 폭력들. 한 번쯤 그런 일이 생겨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특별히 이상하고 생경하며 충격받을 사건은 아닌 일.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충격에 빠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그런 세계에서 무감하게 살고 있었구나 하고.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인표와 은영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이 충격이지 않을까.
우리는 결국 타인의 친절에 기대 살아간다.
이래저래 다들 절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면 대체 은영 없는 세상에서 우린 누가 구해줄 수 있을까.
소설 속에는 '친절함'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옴 잡이 혜민도 그런 혜민의 주치의가 된 의사도. 주인공뿐만 아니라 누구든 하나씩 친절함을 안고 살고 있었다.
옴 잡이 혜민은 난데없이 태어나 반드시 죽는 운명을 가졌다. 처음으로 전쟁 없는 시대의 여성으로 태어나 생리통 빼고 죽을 일 없이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는 징그러운 옴을 잡아먹으며 위산에 녹여낼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는데(영화로 보면 정말 구역질이 절로 난다), 20세가 되기도 전에 죽는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상당히 신비로운 운명을 가진 그녀는 신이 없다고 단정한다. 그가 아무리 열심히 옴을 잡아도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았다. 그는 죽을 운명이었다.
은영은 내심 열심히, 열심히 사람들을 지키고 돕다 보면 흰 수염을 기르거나 옥비녀를 꽂은 누군가가 어느 날 찾아와 "고생했어, 이제 여생을 좀 즐기며 살아." 하고 칭찬하며 해방시켜 주길 바라 왔던 것이다. 백혜민의 입에서 그런 존재는 없다는 말이 나오자 알고 있었으면서도 약간 기운이 빠졌다. - 보건교사 안은영 '전학생 옴' 챕터 中
은영은 내심 신이 있기를 바랐다. 자신을 구원해줄 누군가를 기다렸다. 하지만 누구보다 신비한 운명을 가진 혜민이 신이 없다 했다. 여러 생을 살았지만 그도 구원하지 못한 신이 있을 리가 만무했고 은영은 실망했고 기꺼이 혜민의 구원자이자 신이 되었다.
혜민은 몇 없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은영이 혜민을 구해주겠다 했지만 자신이 없는 사이 옴 때문에 다칠 사람들이 걱정된다며 자신의 생명과 타인의 상처 사이에서 고민할 만큼. 친절을 부사로 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이지 않을까. 자신의 상처를 감당하기에도 벅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기꺼이 구원하는 것. 작은 선이라도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겐 그 또한 작지만 큰 구원 이리라.
은영뿐만 아니라 의사도 혜민에게 친절했다. 의사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했다. 그래서 모두의 살고자 하는 마음을 짊어지게 되었고 디스크라는 고통을 얻었다. 혜민이 위염을 앓았던 것처럼 친절한 의사는 디스크를 앓았다. 척추는 단정한 자세를 만드는 지지대이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뼈대다. 풍파에 지지 않을 삶을 만드는 척추가 휘청거리는 것이 디스크인 것이다. 모든 친절한 사람들은 하나씩의 병을 가지고 있었고, 삶을 담보 삼아 행하는 친절들은 희생이라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은영과 의사는 서로에게, 의사는 혜민에게, 혜민은 사람들에게 친절했다. 책에선 서로서로 맞물려 친절했기 때문에 우리는 삶을 살아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친절에서 친절로 이어지며 서로의 고통을 덜어낼 수 있다.
은영은 해방을 말했지만 우리가 서로에게 얽매여 있기 때문에 외따로 떨어져 나락을 향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은영에게도 그녀의 꽃무늬 취향을 감수하고 자신의 취향을 포기한 인표가 있는 것처럼 누구나 서로의 친절에 기대어 살아감을 말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두 안은영이다.
알고 보면 아주 지독한 폭력에 내던져진 우리는 모두 안은영이다. 또한 안은영으로 살다 보면 누군가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을 베푼 적이 있을 수도 있다. 나는 남들보다 힘이 세서 무거운 걸 대신 들어준 일도 있고, 남들보다 길에 익숙해서 길을 알려준 적도 있다. 늦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길 위에서 낯선 타인을 위해 베푼 친절.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친절을 베풀었거나 베풀 수 있는 일상의 안은영들이다.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폭력은 우리의 친절로 맞서야 하는 적이고 괴이한 악이다. 작고 큰 사람의 마음에서 폭력이 시작된다면, 작고 큰 친절한 행동으로 평화로운 세계도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민음사 책에 있는 정세랑 작가님의 사인
민음사 책을 사면 정세랑 작가님의 사인과 메시지가 적혀있다. 제일 처음 페이지에 그려져 있는데 이 정도면 스포 아닌가 싶다. 아무튼 우리 모두 굴하지 않고 활극인 척 따뜻한 싸움으로 헤쳐나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