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상처, 타인, 다름, 이해
살다 보면 한 번쯤 스스로가 가증스러워질 때가 있다.
나도 모르는 새 나 자신을 치장하는 거짓으로 상대에게 교묘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을 할 때나, 상대의 상처의 깊이를 알고도 짐짓 모른 체 할 때. 그런 나를 발견하는 날이면 끝없는 수치심에 이불속으로 숨어버리곤 한다. 나에게서 나를 숨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숨기고 싶은 나의 오물들을 나는 부끄러워한다.
쇼코의 미소는 최은영 작가의 단편 소설들이 모아진 책이다. 총 7개의 서사가 담겼고 두 개의 평론이 적혀있다. 장편을 기대하고 봤기 때문인지, 가장 처음 이야기인 '쇼코의 미소'가 몇 장 안되어 끝이 났을 때 조금 실망했었다. 하지만 실망은 다음 편으로 이어지면서 금세 사라졌다. 이 소설은 다른 서사로 같은 이야기를 하는 책이었다. 내 안의 오물과 맞닥뜨릴 준비가 되었다면 쇼코의 미소가 여상히 내미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 건 어떨까.
** 스포 주의 **
쇼코의 미소 중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세 개다. <쇼코의 미소>,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한지와 연주>이다. 하지만 모든 단편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길어져서 가장 크게 공감한 한지와 영주에 대해 다뤄보려 한다. 다를 수 있고, 다른 것이 당연한 책이라서 다른 사람들의 감상이 궁금해진다.
한지와 영주
영주는 수녀 같다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무감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 그가 머무름을 위해 해외봉사(수녀원)에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 한지이다. 케냐에서 온 한지는 단숨에 영주의 시선을 빼앗았고 둘은 금세 단짝이 되었다. 영주와 한지는 다른 세계에서 왔다. 한지는 케냐에 평생을 보살펴야 하는 지지대이자 걸림돌인 동생이 있었고, 영주는 없었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영지는 마음 깊이 그와 공명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말은 잘 통하지 않아도 (영어가 둘 다 짧았다) 매일 밤 일기장에 서로를 적을 만큼 추억을 쌓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지가 영주를 외면했다. 무처럼 뚝 잘린 관계, 교감, 언어. 주변에서 영주 너만큼 한지랑 친한 사람이 없었는데 왜 그러냐. 네가 뭘 잘못했느냐. 이런 식의 단절은 옳지 않다 등등 마치 영주의 잘못인양 이야기를 한다.
영주는 혼란스러웠다. 잘라지기 전날 밤 한지는 영주에게 단순하다 했다. 그것 때문인가. 하고 영주는 괴로워하다 한지를 붙잡고 말을 했다. 한지는 울었고 결국 영주는 물러났다. 그렇게 둘의 관계는 끝이 났다.
어떻게 보면 너무도 허무하다. 소설은 영주의 시점에서 진행되는데, '단순한' 영주는 한지와 함께하는 순간들이 너무도 찬란했다. 하나하나가 소중해 일기장에 꼭꼭 적어두었다. 한지는 복잡한 사람이었을까.
단절.
영원한 상실로 이어지게 될 최악의 이별
만남에 여러 길이 있듯이 이별에도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다.
추억으로 이어질 아름다운 이별,
마음의 정리를 위한 단정한 이별,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는 그리운 이별.
이별은 이별로 끝나지 않고 남은 사람의 마음에 남아 다음의 만남과 이별에 영향을 미친다.
그중 한지가 선택한 이별은 단절이었다. 그 무엇도 남기지 않는 無의 영역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 사람 간에 거리를 재는 한지였기 때문일까, 이해하기엔 너무도 짧은 시간이어서였을까, 외국인 영주와 상처와 차이를 딛고 서로 보듬을 용기가 없었기 때문일까.
사람은 모두 다 다르다.
우리는 모두 타인이다.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도 처음부터 외계인처럼 어떤 전기적 결합으로 생각을 공유하지도 않는다.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만남을 유지할 힘은 '소통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내 생각을 이야기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 부지런해야 하고 때론 치열해야 하는 과정의 끝에 이해가 있고 인연이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서로에게 공감하고 한 발자국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 이후에야 적당한 이별의 거리를 잴 수 있다.
어릴 적 만난 친구가 있다.
나의 생각의 방향과 그의 생각의 방향이 다르다는 걸 아는 순간 우리는 대판 싸웠다. 상처 받는 이야기를 하고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런 그와 지금은 이야기한다. 나는 단순한 편이었고 그 친구는 복잡한 편이었기에 나는 그를 최대한 배려했고 친구는 나를 이해한다. 결국 우린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이어나갈 미래를 그린다.
그래서 그런가 영주에게 너무 감정이입을 해버렸다. 단절이라는 선택지에 원망스러웠고 답답했으며 억울했다. 조금 더 설명해주면 되었을 텐데. 조금 더 솔직해졌으면 됐을 텐데. 차라리 대판 싸웠다면 어땠을까.
단절은 그 무엇도 남기지 못하는 이별이다.
애정 했던 그와의 경험은 끝에 남은 허무함이 감싸고, 기억은 삭제된다. 사람이 사람으로 성장한다면 이별이 주는 시간의 가치 또한 있을 텐데, 모든 시간이 삭제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생각보다 많다. 조금 친하다가 어느 순간 삭제되어 버린 사람들. 내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 포기해버린 시간들 말이다. 피곤해서, 상처 받고 싶지 않아서 포기해버린 시간 속에 그런 관계들이 부유한다.
무엇이 맞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관계에는 가능성이 있다. 얼마든지 나아질 수도 (물론 악화될 수도 있다) 있는 가능성.
그 가능성을 믿고 오늘 싫었던 그 사람에게 다시 한번 이유를 물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