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은 비탈에서 굴렀고 엄마는 선생님께 맞았으며 친구는 마음이 상했다.
시간을 되돌려 '그 때'를 생각하면 추억과 더불에 덤으로 딸려 오는것들. 바로 후.회. 라는 녀석이다. 벗어나고 싶어도 찜찜한 마음의 짐. 미안함. 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맞은 내 마음의 희생자들. 일부는 여전히 내 곁에서 나와함께 늙어 가지만 영영 만날 일이 없게 되어버린 사람들은 마음의 짐이 풍선처럼 부푼다.
첫번째 희생자#1 한살터울 남동생에게 '기똥찬' 썰매를 태워주고 싶었다. 마침 가져갈 것도 없는 집에 빈집털이가 들어 방방 문을 모두 부수고 가는 바람에 집 안 내부 수리를 하고 남은 목재가 옥상에 방치되어 있었다. 나무 더미에서 네모난 백과 사전만한 판자를 얻어 가서 밑에 대고 '매처리' -엄마 아빠에게 매맞던 회초리, 몽둥이를 그렇게 불렀다- 같은 기다란 두개의 직사각형을 그 뒤에다 댄 후 못질 몇번에 멋진 썰매가 되었다. 뚝딱 뚝딱 썰매를 만들어가지고는 남동생을 대리고 동네에서 가장 높은 비탈로 갔다. 다니던 초등학교의 아카시아 숲이 있는 제 2 야외 학습장으로 학교의 후문 비탈이다. 더운 날에는 등나무 길에 계단식으로 만들어 놓은 테이블과 돌 의자에서 합창 연습도 하고 여름방학이면 아카시아 잎을 따 먹으러 오기도 하지만 겨울에는 동네 골목대장들의 스키장이다. 이미 많은 개구쟁이들이 줄을 서 썰매를 순서있게 타고 있었다. 사람이 많은지 날이 푹한지 얼음도 많이 녹고 질척 거렸지만 다들 열심히 겨울 놀이 중에 있었다. 남동생을 썰매에 앉힌 후 있는힘껏 그의 등을 밀었다. '똘똘아 그 때 나와 언니는 동생을 똘똘이라고 불렀다.' 내가 재밌게 해 줄께! 아빠다리 해, 아빠다리. 그래야 재밌어.' '하나, 두울, 세엣 !'
남동생은 아빠다리 한 채 저 밑으로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굴려 가고 있었고 내 발밑에는 썰매만 덩그라니 남아 있었다. 그날따라 날도 푹해 빙질도 물러 돌과 진흙이 섞인 비탈 꼭데기에서 저 밑까지 굴러 내려가는 동생을 따라갈 수 없었다. 썰매의 날이 수평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나때문에 남동생은 천치 3주의 상해를 입었다.
두번째 희생자#2 울엄마 혜자는 ‘절대 노안’이었다. 하지만 40대 이후 미모가 역변하여 엄마 친구분들보다 항상 15살정도는 더 어려 보였다. 그것이 가능 했던 이유는 아마도 혼기를 놓쳐 노.노.노처녀로 시집을 간 탓에 뻥을 많이 보태 엄마 친구들이 청첩장 돌릴 때 겨우 기저귀 가방을 졸업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고교생 딸램들이 싫증 낸 옷을 아무거나 입고 다니실때가 많으니 얼핏 보면 언니와 나랑 또래로 보이기 까지 했다. 특히 상고머리 뒷모습은 앞모습이 아니다. 영락없는 청소년이다.
엄마의 뒷태는 그야말로 날리던 소시적 날렵한 운동부 청소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나 준비물 등을 놓고 온 날이면 그런 건강미 넘치는 엄마 챈스를 많이도 이용 했었다. 몇번 우리들의 준비물빵을 대신 해 주시던 엄마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준비물 챙기라는 '매처리' 훈계 대신 종종 그날의 무용담을 기쁨에 차 말씀하셨다.
'아니 글쎄, 내가 막 교문을 뛰어 들어가는데 수위아저씨가 잡지 뭐니. 야! 너 일루와, 그러면서 너 몇학년 몇반인데 지금 들어가냐고 가까이 다가가서 인사를 드리니까 막 당황하시는거지.. 호호호.. 아이구 학생인줄 알았습니다. 하시면서.'
‘글쎄 오늘은 내가 니네 반이 어디인지 몰라 지나가던 선생님께 물었지. 막 놀라면서 글쎄. 아니! 어머님이셨군요. 저는 또 전학생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는거 있지. 호호호!'
음악 피아노 실기 시험이 있던 날, 열심히 연습하고 달달 외웠기 때문에 무심코 악보를 집에 두고 왔는데 막상 시험 시간이 다가오자 앞이 캄캄해지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쉬는시간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서 '엄마! 출동준비! 3층 음악실로! 신발장 위에 악보!' 엄마는 대답도 없이 끊고 우리들이 벗어 놓은 추리닝을 입고 농구화를 갈아 신고 길을 놔 두고 산 자락을 타넘어, 걸어서 25분 넘게 걸리는 학교를 15분만에 도착했다. 막 음악실로 뛰어 올라가던 중, 엄마는 뒤쫒아 오던 체육선생님께 뒷통수를 한대 쎄게 맞으셨다.
' 야 이새끼야, 누가 복도에서 이렇게 뛰래. 실내화는 또 어따 팔아먹었어. 너 그리고 누가 농구화 신고 다니랬어.'
[......]
[......]
'음악실이 정확히 어딘가요.'
'아...... 네...... 다시 한 층 더 내려가시면 됩니다.'
나때문에 엄마는 체육한테 뒷통수를 맞았다.
세번째 희생자#3 나 어릴때는 고무동력기 행글라이더 날리기 대회를 학교 운동회때 했었다.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릴레이 계주이지만 밥을 먹고 다음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전 혹은 가장 마지막 순서에 직접 만든 행글라이더를 가지고 와서 비행하는 시간이 있었다. 아니면 혹은 어떤 한 날을 정해 행글라이더 날리기 대회를 한 것인지 내 기억이 정확치가 않다. 아무튼 정확한 것은 그 날 나는 거기에 있었고 너무도 하기 싫은 행글라이더 만들기에 습자지를 붙이고 대나무를 휘고 별짓을 다 하고도 비행기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멀리 날리기 위해서는 최대한 가벼워야 하는데 계속 풀칠을 하고 날개를 보수하는 통에 비행기는 점점 무거워 져서 입상을 하지 못할것 같았다. 원래 내 전공도 아니고 나는 종이 인형 오리기나 종이 접기인데 행글라이더는...... 그냥 시키니까 해 준다는 마음 가짐으로 끝까지 비행기 모양이나 만들어 보자 하고 스탠드 저 위에 올라가서 혼자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스탠드 한칸 두칸 세칸 아래에서 열심히 비행기의 마지막을 손보고 있던 학급반 친구가 가위좀 줄래? 하며 올려다 본것 같다. 나는 쓰고있던 가위를 아래로 휙 던졌고 가위는 정확히 친구의 고무동력기 날개 가운데 퍽 하고 꽂혔다. 몇 분 후면 경기가 시작되고 딱풀이 있던 시절도 아니어서 날개를 다시 보수하느라 종이칠 풀칠을 떡칠하면 물 마를 새도 없이 경기에 참가 해야 한다. 울그락 불그락 음소거 상태. '어떻하지!' 너무 무서웠다. 무슨 말을 했는지 그 다음이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항상 고무 동력기 대회에서 일등을 하던 친구였는데 저 멀리서 날다가 주저 앉는 친구의 비행기가 보였다. 너무 미안해서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사람이 너무 미안하면 아무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하지만 내 얼굴은 웃고 있었다.
나 때문에 친구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