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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욜란다 Jun 20. 2022

02 만약에 그 때

지하철 5호선의 금성무


그 날도 어김없이 5호선으로 환승했다.

출근길 지옥철이다. 돈 벌러 가는 길. 반복되는 일상. 한 주의 사이클은 유효기간도 없이 왜 이리 반복되어 잘도 돌아가는지. 월요일은 특히나 더 죽을 맛이다. 돈 벌러 가는 길이 저승길 같은 지하철을 두 번 혹은 세 번 갈아타고 이동해야 하는 출근길은 가는 데만 벌써 진이 빠진다. 축적된 피로가 양 날갯죽지를 짓누른다. 어떤 날은 작년 추석 때 피곤까지 몰려온 적도 있다. 매일의 전쟁터 가는 길에서 무엇인가 이 안에서도 나름대로의 기쁨을 발견해야만 정상으로 유지될수 있는 일상이다.  


[출처] Unsplash


따악, 그 열량으로 들어가 정해진 자리에 앉는다. 나는 항상 문가 쇠 봉 옆에 앉는것이 편하다. 적어도 한쪽 면은 사람들과 맞닿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문이 열린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대각선 맞은편 문이 열리면 드디어 노트북 가방을 가로로 메고 폴로 감색 잠바에 하늘색 셔츠 카키색 혹은 베이지색 면바지에 닥터 마틴을 신은 5호선의 금성무가 들어온다. 여기서 잠깐, 금성무란 20대 리즈시절 중경삼림의 금성무를 말한다. 어디 하나 나무랄 곳이 없는 내 스타일. 피부가 하얗고 손도 아주 하얗고 머리칼은 까맸으며 안경을 썼던 것도 같다. 나는 영화 속 금성무의 팬인 적도 없었고 그의 영화를 보고 한 번도 좋아해 본 적이 없었는데 현실에서 내 옆에 금성무 닮은 사람이 서 있으니 그냥 팬이 되고 말았다. 키가 금성무처럼 크지도 얼굴이 그렇게 길드랗지도 않았지만 아무튼 무척 곱고 흰 순한 맛 금성무였다. 나에게도 아침 5호선을 열심히 타야 하는 충분한 이유라는것이 생겼다.



성무는 자리가 나도 앉지 않고 항상 내려야 할 문 앞에 선다. 그러면 나는 대각선으로 그의 뒷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언제 처음 그를 만나게 되었는지는 확실 치 않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매일매일 아침 출근 날 성무를 만났다. 항상 그 문으로 들어와 돌아 내릴 때까지 문 앞에 서 있는다. 내릴 때 문은 올라가는 계단과 늘 딱 만나있다. 나는 아무 데서나 타고 아무 데서나 내리고 계단이 여기 있건 저기 있건 개의치 않는데 우리 성무는 딱딱 그 지점을 맞추어 탑승하고 하차한다. 아침 출근길 야무진 직장인의 모습으로 그런 그의 모습이 몹시 믿음직스럽다.


그런데.... 나를 향해 등지고 서 있는 성무의 바지 무릎 뒤쪽 즉 '오금'이 저리다의 오금 부분이 전혀 구겨지지 않았다. '면바지의 오금이 구겨지지 않다니' 놀라운 일이다. 잠깐 앉았다 일어나도 신발 끈만 묶더라도 쉽게 구겨지는 부분인데 칼처럼 펴져 있다. 다른 사람들의 바지 모양도 관찰했다. 모두 꾸깃꾸깃 벌써 주름이 잡혀 있었다. 금성무는 바른생활 사나이임이 분명하다. 얼굴도 금성무인데 바지까지 쫙 펴 있고 올바른 성무의 일상을 상상하기에 충분했다. 매일 아침 나는 성무를 만나고 출근하면 교무실에서 선생님들께 지하철 5호선 금성무 간증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다려졌다. 오늘도 만날까? 내일도 만날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내가 출근하는 날은 매일 보았으니 매일매일이 천국 열차였다. 성무의 머리 모양과 구김살 없는 단정함은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어제보다 더 뽀송 뽀송한 외모는 나날이 진화하는 듯했다. 항상 같은 시간대 같은 열량에서의 만남. 지하철 5호선의 금성무, 내가 출근을 해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도대체 누구니? 자기야 나도 좀 보자."


나 사는데랑 정반대 편에 살았던 직장 동료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출근길에 동행 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돌아가며 당직을 하는 방학 중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녀와 어느 어느 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금성무의 열량을 타기 위해 기다렸다. 자꾸만 다시 강조하게 된다. 중경삼림의 금성무 이다.



"온다, 온다... 선생님 빨리 신문...... 얼굴좀 가려요. 우리가 보는 거 티 나겠어." 


당시 나는 성당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읽지 않아도 평화신문을 다지고 다녔다.


"어머 어머 어머 어머! 자기야 있다 있어. 뭔 말인지 알겠네. 금성무가 있네."

"있죠, 있죠, 있죠!! 뭐야 뭐야 뭐야 빨리 얼굴, 신문 안으로 드루와요"

"자기야 근데 금성무 되게 멋지다!"


가장 남자 보는 눈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직장 동료에게 성무의 멋짐을 인정받는 순간 뿌듯함이 온몸을 감쌌다.


그 후로 오며 가며 할 말 없을 때마다 모두가 인사말로 '자기야 오늘 금성무 만났어?' 안부 묻기로 형식적인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고 계절이 바뀌었는지 새해가 밝았는지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마주쳤는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되었을 때 드디어 그날이 오게 되었다. 내일이면 한국에서 5호선을 더 이상 탈 일이 없게 된 날. 마지막 근무하는 날이 다가왔다. 신학기 오리엔테이션만 마치고 미국으로 출국해야 하는 날이 다가온 것이다. 아직 일주일 정도는 더 한국에 머무를 것이지만 출근은 내일로 마지막이고 이제 성무를 못 만날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도 섭섭했다. 나의 출근길 설렘과 기쁨이었는데 아! 애석하다. Hi! 라도 해 둘걸.


모눈종이 다이어리를 찢어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고 일단 외투 주머니 안에 메모를 넣어 두었다. 보통 옛날 TV 를 보면 남자가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쪽지를 주지만 이번 경우에는 금성무가 안 주니까 내가 주기로 했다. 나는 3월의 꽃샘추위로 검정 타이즈에 소다 단화와 검정 스커트에 검정 외투를 입고 안에는 회색과 분홍 테두리가 있는 폴라 앙상블을 입고 있었다. 그 검정 외투 주머니 속 내 주먹에는 꼬깃꼬깃한 모눈종이 쪼가리가 들어 있었다.


문이 열리고 지하철 5호선의 금성무가 탑승했다. 떨리는 마음. 그런데 슬프다. 미국에도 가야 하는 계획이 있었던 아쉬운 출국. 나에게 미국행은 이런 가슴 뛰는 좋은 것들도 두고 가야 하는 절반의 선택이었다. 오늘은 오금이 접혀 있는지 펴져 있는지 볼 요량으로 모가지를 쭉 빼다가 성무와 눈이 마주친 것 같다. 갑자기 그가 이리로 저벅저벅 걸어온다. 왜 오지? 우심장 좌심장이 비트박스를 시작한다. 문 쪽에 서 있다 계단 앞에 이르러 내려야 하는데 내 앞에 와서 손잡이를 잡고 선다. 주머니 안에 쪽지를 쥔 주먹을 더 똘똘 뭉쳐 쥐고는 둘 다 똥 싼 강아지처럼 머뭇머뭇하다가 드디어 열차는 성무의 '데스티네이션'에 다다랐다. 뭐라 할 말이 있는 듯, 하지만 오른쪽 문이 열리고 올라가야 할 계단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고 아쉬운 발걸음으로 마지막 오금을 보았다

만약에 그 때......


만약에 그때 내가 전화번호를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안 그래도 계속 쳐다보셔서 자꾸 신경 쓰였는데 한 번만 더 그러면 스토커로 신고한다....... 뭐 이런 경고를 할 모양이었을까? 하니면 Hi 하고 어, 근데 저 다음 주에 미국 가요 하고 Bye했으려나. 영화배우 닮은 친구 한 명 더 생기는 기회였는데 내가 차 버린 것인가? 이렇게 아쉬울 줄 알았으면 사인이라도 받아 두는 건데. 지하철 5호선은 아직도 잘 달리고 있던데 만약에 그때 내가 따라 내리기라도 했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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