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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Nov 16. 2021

이번 생에 미니멀 라이프는 힘들 것 같아요.

취미가 많은 박애주의자의 삶

몇 년 전부터 꾸준히 화자 되는 라이프 스타일 '미니멀리스트'.  삶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들만 소유하는 것.

나도 관심을 두고 꾸준히 책도 읽고, 영상과 사진 및 여러 정보를 찾아보고 있다. 공간 안에 필요한 가구와 물건이 있는 사진과 영상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도 깨끗하게 정화되는 기분이다. 한참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내 공간을 그렇게 만들고 싶다는 의욕이 생긴다. 그리고 '나도 버려보자!'는 마음으로 나의 물건들을 살펴보노라면... 세상에나. 버릴게 별로 없다.


세상의 모든 예쁜 것들을 사랑하는 박애주의자가 나다. 내가 가진 물건들에게 애정이 있다. 어느 미니멀 라이프 전문가는 설레지 않는다면 버리라고 했는데, 아직도 너무 많은 물건들에게 설레어서 버릴 수가 없다. 10여 년 전에 산 코트도, 15년 전에 산 스카프도, 20년 전에 산 가방도. 한 책을 여러 번 읽기도 하는 나이기에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도 버릴 수가 없다.

다 버리겠다고 커다란 쓰레기봉투 옆구리에 끼지만 결국 큰 변화 없이 끝난다.  내 공간은 사진과 영상 속의 그곳들처럼 될 수 없다. 그래서 결국 인정해 버렸다. 미니멀 라이프는 나의 이상이긴 하지만 나는 될 수 없다. 나는 이번 생에 미니멀 라이프는 힘들 것 같다.  아마도 언제나 미니멀 라이프를 꿈꾸는 맥시멀 라이프로 남을 듯하다.


그러면 전부 이고 지고 살면 되지 왜 그러느냐 하겠지만, 그러기엔 내 처지가 지금 기약 없는 해외 살이 중이라는 것이다.

해외에서 평생 산다면 내가 사랑하는 물건들을 전부 고이 포장해서 가지고 나가면 되지만 언젠간 돌아올 몸이라 무작정 다 가지고 나가지도, 가지고 들어오지도 못하는 현실이다. 그렇게 친정집에 쌓여있는 내 짐이 한가득이다. 그런데 이번에 제대로 사달이 났다. 둘째 아이 출산을 위해 한국에 온 지 1년. 이제 곧 돌아가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슬슬 짐을 정리해야 하는데, 세상에나 내가 1년 동안 이렇게나 많은 짐을 만들어 놨단 말이가.

물론 가지고 나온 짐이 많기는 했다. 대부분이 아이 짐이었다. 그런데 내가 1년 동안 내 물건을 더 보태놓은 것이다. 그중 제일 많은 것이 책이다. 빌려 읽기도 했고, 전자책도 읽지만 꼭 소장하고 싶은 책들은 결국 종이책으로 구입을 했는데 한 권, 두권 모이다 보니 꽤 양이 된다. 책은 무게까지 있어서 해외 살이에서 가장 큰 짐인데 말이다. 그리고 취미생활을 위한 아이템에 둘째 아이 짐까지 더해지다 보니 이걸 다 정리할 일이 까마득하다.


이럴 때마다 미니멀 라이프를 다짐한다. 미리 짐을 정리해서 일본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엔 진짜 다 정리하고 가겠노라 다짐하고 박스를 꺼냈다. 친구들 중에 가장 출산을 늦게 한 터라 큰 아이 때부터 친구들에게 옷을 많이 물려받았다. 게다가 둘째도 동성을 기대하고 버리지 않고 넣어둔 아이 옷이 한가득이다. 많이 입어 낡은 옷들과, 절대로 내가 입히지 않을 것 같은 옷들은 정리했다. 한참을 버렸는데도 남은 게 한가득. 역시나 내 스타일 이쁜이들은 정말 버리지를 못하겠다. 한 번을 입히더라고 둘째도 입히고 말겠다는 심정으로 남긴다. 다음은 책이다. 책이 가장 어렵다. 몇 번이나 책을 박스에 넣었다, 뺐다 했는지 모른다. 그러다 기준을 정했다. 나중에 아이들에게도 권해주고 싶은 책인지 아닌지, 아이와 함께 다시 읽고 싶은 책인지 아닌지. 그렇게 정하니 한결 속도가 나간다. 엄청난 양을 동네 종이 수집하시는 분에게 드렸다. 그리고 다음 카테고리는 옷, 임신 중에 입었던 옷들은 이제 더 이상 입을 일이 없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버렸다. 그런데 그다음이 난관이다. 나는 원래 유행에 맞춰 옷을 사는 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면서 오래 입을 옷을 산다. 그래서 내 옷들은 수명이 좀 길다. 그렇다 보니 쉽게 버릴 수 있는 옷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비슷한 스타일의 옷들을 걸러냈다.


이렇게 몇 날 며칠 큰아이가 어린이집에 간사이 둘째가 잠들었거나, 엄마가 봐주시는 시간에 짐 정리를 했다. 한참을 버렸다. 이제는 정말 미니멀 라이프에 가까워졌다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일본으로 보낼 짐이 우체국 박스 가장 큰 걸로 7개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정말 많이 버리고, 정말 필요하다 생각한 것만 남긴 것 같은데 이 양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이걸 가지고 우체국까지는 또 어떻게 간단 말인가. 쌓이는 박스를 보니 마음이 무겁다. 돌아가서 정리는 또 어떻게 한담. 그러다 문득 무서워졌다.

버린 것도 양이 엄청난데 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짐을 쌓아놓고 지내왔단 말인지 온 몸이 뻐근하다.

쌓여있는 박스가  "그대에겐 아직 7박스의 짐이 남아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데 박스는 쌓여있지만 기분은 꽤 개운하다. 쌓여있는 박스만큼 버리기도 했기 때문일까? 쌓여있던 응어리를 털어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남아있는 7박스의 짐은 그렇게 고민해서 남긴 나의 추억과 삶의 일부이다. 언젠가 저 박스의 짐들도 버려지는 날이 오겠지만 아직은 아니란 거다.

7박스의 짐은 실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나에겐 아직 가슴 설레는 예쁘고 소중한 내 물건들이다.


저 박스는 바다 건너 일본으로 건너가 나의 공간에서 다시 자리 잡을 것이다. 내 아이들이 입고 읽고 쓸 물건들이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에 동참해 줄 물건들이고, 나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줄 물건들이며 나에게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줄 물건들이다. 그러니 나는 저 물건들을 허투루 쓰지 않고 함부로 다루지 않도록 잘 정리해서 함께 할 예정이다. 그렇게 함께 잘 지내다가 물건들의 수명이 다하거나 나에게 필요 없어지면 그땐 또 다른 필요한 이에게 주거나 혹은 고이 버려 그 물건이 할 일을 다하게 하겠다.


그렇게 마음먹고 짐들을 보고 있으니 이제는 마음이 무겁지 않다. 물건들과 지낼 날들이 기대가 될 정도이다. 그리고 이제 한 번 짐 정리를 해본 사람이 아닌가.

한 달 후 돌아가면 그곳에서 또 한 번 짐 정리를 할 생각이다. 1년 전 두고 왔던 짐들을 상대로.


그렇게 내 주변엔 정말 나에게 필요한 물건들만 놔둘 생각이다. 다만 취미 많고 박애주의자인 나에겐 설레고 필요한 물건이 좀 많을 뿐.


그래서 이번 생엔, 미니멀 라이프는 좀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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