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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안 Dec 29. 2022

내 가장 증오하는 남편에게



나 매거진에 편지를 쓰려고. 만인보처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대신.


잘했다. 네가 제일 잘 쓰는 게 편지잖아.


그렇게 편지를 연재한다.


나의 첫 의뢰인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지독하게 육아기를 보냈다. 첫사랑은 자기 남편인데, 가장 증오하는 사람도 자기 남편이 되어버린. 어찌할 수 없는 거센 파도를 맞으며 그렇게 가장 사랑하던 사람을 가장 증오하게 되었다. 이제 그 터널을 지나려나보다. 남편에게 줄 선물을 샀다며 편지를 의뢰해 왔다.


말이 가진 보편적인 공감력에 기대고, 내 경험에 반추해 가며, 친애하는 나의 의뢰인에게.

————————————


연애 때도 안 쓰던 편지를 써보네.

누가 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물으면 의심할 여지없이 오빠랑 연애할 때로 나를 데려다 놓더라. 내 인생에서 가장 충분히 사랑받고 나 스스로를 사랑하던 시절.


어느새 우리한테 서은 민서 민준이 생기고 비로소 나와 오빠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는 것 같아. 나를 내 존재 그대로 -내가 어떤 잘못을 하든-수용하고 사랑하라고. 오빠에게 그런 폭압적인 기대를 하던 나는 이제  가족 안에서 오빠를 걱정하고, 아이들을 잘 기를 궁리를 해.


잠자는 것부터 커피 한 잔 마시는 것 어느 하나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육아기에 나는 때때로 비참해지고 무너지는 마음을 분노로 표현했어. 그 곁에 오빠가 있어, 내 욕받이가 되어 주었지.


오빠는 이른 아침에 나가 심야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와. 내 인생에서 재미는 사치라는 굳은 표정으로 골방 같은 방에 들어가 술 한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해. 굴러다니는 막걸리병 맥주캔을 치우면서 집안일에 한 술 더 보태주는 오빠가 원망스러우면서도 측은했어. 어쩜 이리 자기 자신을 위해 제대로 쓰는 시간도 돈도 없을까. 유일하게 쓰는 돈이 어떻게 하루 고단함을 잊고 잠들어보려는 고작 술뿐일까. 측은하고 미안해.


나도 어디 나가 돈 벌 능력이라도 있으면 이 사람이 어깨가 조금 덜 무겁지 않을까. 나도 생활비를 어떻게 하면 더 받아낼까 궁리나 하며 그렇게 하루를 다 보내지 않는다는 걸, 오빠 걱정에 내 마음도 쓰고 있다는 걸 알고 나면 하루가 좀 덜 고단할까.


사랑한다는 감정이 설렘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가는 중이야. 측은하고 미안하고 걱정되고 고마운 그 모든 마음도 그 일부라는 걸.


‘여기가 내 밑바닥이다 더 아래는 없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밑바닥 기록을 여러 번 갈아 치웠어. 내 밑바닥이 생각보다 깊더라고. 지질하고 부끄럽고 민망한 모습들도 부부로 살아온 시간 동안 묵은 때처럼 쌓여가.


자식이 있으며 우리는 포기할 수 없는 공동의 목표가 있고, 서로 등을 돌리더라도 언제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해야만 할 이유가 생긴 거니까. 그렇게 우리 관계가 더 강하게 연결되었다고 생각해.


아이들 훌쩍 자라고 나면 남은 것은 다시 우리 둘이니, 서로 이해해가며 눈 감아주며 그렇게 건강하게 살아가자.


지금껏 우리 집 건사한다고 애써줘서 고마워. 오빠 덕에 우리 이렇게 편하게 걱정 없이 산다. 돈은 내가 벌게! 오빤 집안일이나 해! 그런 로또 같은 희망도 꿈꾸며 잠시라도 설레보자. 지난 시간을 보상하기에 형편없지만 올 한 해 고생한 오빠를 위해 준비한 내 선물을 기쁘게 받아주길 바라며.


아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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