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이트메어 앨리, 2022> 리뷰
* 해당 리뷰는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해당 리뷰는 이동진 평론가의 해설(언택트톡)이 포함된 상영을 관람한 후에 작성하였으며, 영화에 대한 이동진 평론가의 해설 일부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라는 것을 알고 보지 않았더라면, 그의 영화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뻔했다.
‘악몽의 골목(Nightmare Alley)’이라는 매우 기예르모 델 토로스러운 제목과는 달리, 실제 영화 속에는 제목을 통해 상상할 법한 장면들, 그러니까 <판의 미로> 속 소녀처럼 주인공이 ‘악몽의 골목’이라는 이세계(異世界)로 들어가거나, <악마의 등뼈> 속 소년처럼 악몽을 유발하는 유령이 주인공의 주변을 서성이는 장면들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영화 <나이트메어 앨리>에는 그의 영화 속 단골손님인 ‘꿈과 같은 판타지 장면’도, ‘유령이나 괴생명체’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주인공이 몸담고 있었던 서커스단의 멤버들 또한 (팀 버튼의 영화 <빅 피쉬> 속 등장인물들과 비교한다면) 평범 그 자체이다. 그나마 기괴한 생명체라고 한다면 서커스단장인 클렘이 수집한 태아 표본 ‘에녹(Enoch)’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에녹은 유리병 안에 부동의 상태로 있기때문에, 사실상 생명체라기보다 하나의 물건처럼 느껴져 공포를 자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런 면에서 그동안 델 토로 작품이 지닌 시각적 기괴함과 공포 때문에 관람을 꺼려왔던 사람이라면, 이번 작품은 도전해보아도 좋을 듯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이번 영화는 델 토로의 '순한 맛 버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의 영화들의 가장 큰 특징은 판타지와 극사실주의의 교묘한 중첩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동진 평론가 또한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보통 판타지 작품들은 그 작품이 담고 있는 사건의 신비함을 배가하기 위해 이야기의 배경을 모호하게 설정한다. “옛날 옛적 어느 한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다.”처럼 말이다. 그러나 델 토로는 판타지 이야기를 다룸에 있어 그 사건이 일어난 시기와 공간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왔다. <셰이프 오브 워터>가 냉전 시기인 1960년대 미 항공우주 연구센터를 배경으로 한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델 토로는 판타지의 세계와 현실 세계를 교묘하게 중첩시켜왔다. <나이트메어 앨리>의 서사 또한 1939년의 남부와 1941년의 뉴욕이라는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전개된다. 이러한 시공간적 정보는 (언제나 그랬듯) 라디오 뉴스나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제시된다. 그러나 <나이트메어 앨리>에서는 두 세계의 중첩이 한 단계 더 나아가 완전한 합치를 이루는 듯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트메어 앨리>에서는 악몽(꿈)이라는 판타지 공간 대신 악몽과 같은 현실 공간만을 보여준다. 마치 “우리 삶 자체가 그냥 악몽이야 이 양반들아”라고 시니컬하게 말하는 듯하다. 실제로 영화가 후반부로 달려갈수록 주인공의 '현실'이 벗어날 수 없는 '악몽 그 자체'라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누구나 악몽을 꿔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악몽을 꿀 때 가장 공포스럽게 느끼는 지점은 꿈속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 자체보다는 그 사건에서 벗어날 수 없음 때문이다. 악몽을 꾸는 동안 우리는 공포와 고통(을 유발하는 존재)으로부터 달아나려 애를 쓰지만, 출구 없이 이어진 악몽의 좁은 골목은 우리를 끝끝내 놓아주지 않는다. 이 같은 악몽의 골목은 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악몽은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아 ㅆㅂ 꿈....”이라며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탈출 불가능이다. 그렇기에 <나이트메어 앨리>에서 주인공이 겪는 현실의 악몽은 더욱더 끔찍하고 더욱더 가혹하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기괴한 판타지보다 현실이 더욱 매운맛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거짓희망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다. 주인공 스탠(브래들리 쿠퍼)은 심령술을 가장하여 사람들에게 거짓희망을 판매한다. 어떤 이가 보았을 때는 이것이 사기행위일 뿐이라고 비난하겠지만, 스탠은 그들을 고통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준다는 점에 있어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는 ‘거짓희망은 거짓된 희망일 뿐’이라고 말한다. 거짓희망은 인간에게 찰나의 행복을 선사하지만, 그 뒤엔 더한 고통이 뒤따라오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술이다. 술은 먹는 순간 행복을 주는 듯 보이지만, 그 거짓희망에 중독되면 결국 자기파괴에 이르게 된다. 스탠의 아버지와 유사 아버지인 피트, 그리고 철창에 갇힌 기인(geek)처럼 말이다. 스탠은 술에 대해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며, 자신은 그들(술로 파멸한 아버지, 피트, 기인)과 다른 사람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스탠은 자신이 중독된 심령술이 결국 술과 동일한 거짓희망이라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한다. 스탠은 사람들에게 (찰나의) 행복을 선사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심령술 공연으로 거짓희망을 생성하지만, 결국 자신이 만든 거짓희망 때문에 파멸하고 만다. 사실 심령술은 술보다도 더욱 위험한 거짓희망이다. 술은 자기 자신만을 파멸로 몰아넣지만, 스탠의 심령술은 그에게 거짓희망을 구매하였던 이들까지 파멸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이 영화가 “미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살펴보는 영화”라고 소개하였다. 그가 말하는 미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 즉 악몽을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한때 미국은 기회의 땅으로 불렸으며 모두가 그 땅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다. 그러나 아메리칸 드림은 동전의 양면처럼 악몽과 등을 맞대고 있었다. 당시 미국인들에게 (또는 이민자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일종의 거짓희망이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영화는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위기가 막 시작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1939년과 1941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설정하였다. 이동진 평론가는 이러한 위기의 시기가 바로 동화(혹은 거짓희망)가 요구되는 시기라고 설명하였다. 위기일수록 사람들은 거짓희망에 목을 매는 법이다. 거짓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마저도 없다면 이 악몽의 골목에서 견뎌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릴리스(케이트 블란쳇)의 대사가 이를 잘 설명해준다.
“당신이 사람들을 속이는 게 아니야, 사람들이 스스로를 속이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