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본 대회를 시작한 지 4일째이다. 시간이 어쩜 이렇게 빠르게 지나갈까 싶다. 많은 신부님들과 함께 하는 미사에 매일 참여하고 있으니 큰 은총이다. 마지막 날은 C 교구가 맡았고 성시간 미사로 진행이 되었는데 너무 좋았다. 한국 교구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오늘로 마무리가 되었다.
쉬는 시간에는 성당 앞에 간이매점이 있어서 늘 에스프레소 한 잔씩 마시러 나왔었는데 오늘은 바로 옆 작은 카페를 갔다. 커피 메뉴명이 생각이 안 나는데… 연유처럼 달달한 시럽이 들어가서 너무너무 맛있었다. 커피를 입에 털어 넣고 근처에 있는 마트에서 순례자 메뉴를 픽업해 왔다. 점심시간에 가면 금세 매진되기 때문에 바삐 움직여야 한다.
오전 일정을 마친 뒤 조원들과 나의 단짝 및 다른 조원들도 합류해 성당 옆 잔디에 펼쳐놓고 점심 식사를 했다.
오늘은 일정이 좀 더 빡빡하다. 공식 행사로 느지막한 오후부터 Parque Eduardo VII(전체 공식 행사는 폐막미사 제외하고 거의 여기서 진행함)에서 십자가의 길을 한다. 그전까지 자유시간이 짧아서 부지런히 다녀야 한다.
공식 행사 전에 고해성사를 하러 가기로 했다. Garden Vasco da Gama에서 진행돼서 구도심 벨렘 지구 쪽으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 다양한 언어로 순례자들이 고해할 수 있도록 본 대회 기간동안 각 국의 신부님들께서 각 언어에 맞는 부스에 대기하고 계신다.
인파가 어마어마했다. 나는 한국 신부님들보다 영어가 편할 것 같아서 영어 쪽 부스에서 대기했다. 한 낮이라 꽤 더웠는데 오래 기다려야 하는 순례자들을 위해 곳곳에 정수기와 무료 생수가 비치되어 있다.
너무 귀여운 고해성사 부스… 인원이 많으니 간이식으로 준비한 건데 참 잘해놨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고해성사를 어디서 해보겠나!
후련하게 고해성사를 마치고 이동하려는데 지하철역이나 버스 정류장은 이미 사람들이 넘쳐난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결국 팀을 나누어 택시로 이동하기로 했다. Bolt로 콜을 하는 데도 잘 안 잡혀서 기다리다가 다행히 한 팀도 빠짐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출발했다. Parque Eduardo VII 인근은 역시나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역이 폐쇄돼서 근처에 내려 입구까지 걸어갔다. 나, 단짝, 그리고 우리 조원 한 명이 같이 움직였는데 공원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 입구 쪽 잔디에 미리 자리잡은 우리 교구 청년들도 보였다.
그나마 발 디딜 수 있는 지금이 아니면 화장실에 못 갈 것 같아서 우리 셋은 공원 안쪽 화장실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줄 서서 겨우 화장실에 들렀다가 나와서 다시 우리 교구가 있는 입구 쪽으로 이동하려고 했는데 중간 길을 막고 통제하고 있었다.
우리 조 신부님과 조원들도 도착했다고 연락이 와서 합류해야 하는데 바깥쪽에서는 들어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안쪽에 덩그러니 남겨진 우리 셋. 이게 또 다른 행운의 시작일 줄은 몰랐다.
곧 엄청난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고 우리 셋은 길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 날 우리는 교황님이 공원에 들어오시는 것을 바로 앞에서 봤다. 화장실에 들른다고 안쪽으로 들어온 것이 신의 한 수가 될 줄이야. 단짝하고 같이 있으면 운이 배가 되는 느낌이다. 감동의 물결!
경호원들을 대동한 교황님 차량은 순례자들을 위해 천천히 이동했다. 교황님 얼굴을 보는 순간은 감격스러우나 참 고생이 많으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민들이 있는 곳마다 손 흔들어주고 인사해야 하니 연세도 많으신데 힘드실 듯… 참 책임이 무거운 자리다.
곧 십자가의 길이 시작됐다. 돗자리를 펴고 자리를 잡았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하마터면 앉지도 못할 뻔했다. 한국의 다른 교구 신부님을 우연히 만나 십자가의 길을 같이 하게 됐다. 전광판은 포르투갈어로 진행되고 있었고 우리는 번역본을 보고 함께 했다. 십자가의 길이 끝나고 빠져나가는 인파에 밀려 조원들과 만나지 못하고 각자도생 하기로 했다.
나와 단짝은 한국 교구 프로그램을 진행한 성당에서 성시간 저녁미사가 있다고 해서 가보기로 했다. 영어로 진행되서 다른 국가 순례자들도 많이 왔다. 성 시간 미사 중에 한 명씩 제대 앞으로 나와 묵상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꽤 오래 걸렸다. 다 끝나고 나오니 10시가 넘었던 것 같다.
저녁 식사는 줄 서서 먹는 피자집을 아직 안가본 단짝을 위해 Pasta Non Basta Avenidas Novas로 결정! 늦은 저녁에도 여전히 순례자들이 많았다. 앉아서 기다리는데 슬슬 피곤이 밀려오고 있었다. 우선 입가심으로 맥주 두 잔을 주문했고 한참 수다를 떨고 난 뒤에 피자가 나왔다. 사장님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맥주는 서비스로 주겠다고 하셨다. 이렇게 감사한 일이... 오래 기다릴 거 알고 왔다고 계산하겠다고 했는데도 그냥 가라는 사장님. 오히려 친절한 고객을 만나서 본인도 감사하다고 말씀해 주셨다. 참 좋은 분이시다. 사장님과 직원들하고 화기애애하게 이야기 나누고 기념사진도 찍고 나서 기분 좋게 식당을 나섰다. 단짝과 나는 참 운이 좋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도 친절하고 음식도 맛있다. 참 감사한 일이다. 다음에 리스본에 오면 이 피자집은 꼭 다시 와야지.
기분 좋은 하루가 저물어간다. 낮에 도로에 있던 철근봉을 못 보고 부딪히는 바람에 무릎 밑이 살짝 파이고 피를 보기는 했지만 큰 상처도 아닌데 뭐. 지금까지 아픈 곳 없이 무탈하게 보내는 하루하루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