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작고도 소중한 뜻밖의 행운
일전에 아이들이 무슨 유튜버 영화를 보여 달라기에 찾아보니 개봉 예정작이었다. 부모님 댁에 내려가서 보면 좋을 것 같아 좌석 두 개만 예매했다. 아이들끼리만 영화를 보는 것은 공주 열 살, 왕자 일곱 살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 러닝타임이 짧길래 콜라와 팝콘 각 1인분씩 들려 보낸 뒤 가까운 카페에 들어갔다.
가 본 기억이 없는 곳이어서 메뉴판을 찬찬히 살폈다. 오전에 모카포트로 만든 커피를 두 잔 가득 마셨으니 카페인 음료는 탈락, 남은 건 티 종류였다. 평소 카페가 혼잡하지 않으면 물어보는 편인데 특히 밀크티가 먹고 싶을 땐 어떻게 만드는지 물어보고 잎차나 티백으로 만들어 주는 곳에서만 밀크티를 마신다. (생각해 보시라, 카페 라테를 시켰는데 믹스 커피를 타 주면 얼마나 속상한가.)
유자차를 마실까, 자몽차가 좋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다 사장님이 너무 스탠바이 하고 계시는 게 민망해서 자몽차는 많이 달달한지 물었다. 사장님은 청을 넣고 만드는 음료라 달달한 편이라고 했다.
"사장님, 혹시 좀 쌍큼한 메뉴를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쌍큼한 거요?"
"네, 조금 달달한 건 괜찮은데 쌍큼한 맛이 나는 게 있을까요?"
사장님은 혹시 아이스로 드시냐고 되물었다.
"아뇨, 뜨요, 뜨로 마실 거예요."
어째서인지 사장님이 잠시 웃음을 참으며 생각에 잠기는 듯한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사장님이 말했다.
"그럼 어쩌고 저쩌고 캐모마일티는 어떠세요? 원래 아이스로만 되는 건데 제가 따뜻하게 만들어 드릴게요. 저는 맛이 괜찮더라구요.“
때깔이 참 곱길래 그래도 될까 (예의상) 여쭌 뒤 냉큼 감사하다 인사했다. 입맛에 아주 딱이던 티를 행복하게 홀짝이다 연재글을 썼고 다시 티를 마셨는데 아뿔싸, 반쯤 남은 티가 아주 차게 식어 있었다. 황량한 매장에서 나는 이걸 데워 달라고 하면 진상인가 아닌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는 주문대 쪽으로 가 전자레인지 비스무리한 것을 포착한 후 음료를 가져와 조금만 데워주십사 하니 사장님은 흔쾌히 다 되면 갖다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잠시 후 사장님이 테이블로 가져다 준 머그에는 처음 주문했을 때만큼이나 음료가 가득 들어 있었다.
“아니 사장님 이게 왜 양이…“
조금 더 탔다고 하시는데 아마도 뜨거운 물을 더 넣느라 청도 더 넣고 새로 만드신 듯했다. 곧 아이들 데리러 갈 시간이라 콸콸콸 들이키긴 했지만 뜬금포로 기분이 좋아지기엔 충분한 이벤트였다. 최대치 진상에 최대치의 친절함으로 응대해 준 사장님께 아주 감사하여 다음에는 군말 없이 주문하고 빵도 사 먹을게요, 쪄 죽을 때 꼭 다시 아이스로 시켜 먹을게요, 다짐했다.
머그를 반납하러 가자 자동으로 테이크아웃 컵에다 손을 뻗는 사장님께 나는 자랑스레 완전 다 마셨다고 감사하다 인사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기들끼리만 영화를 보고 나온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밖에 나오자마자 둘 다 너무 급해서 화장실부터 다녀왔으며 영화는 여태 본 것 중 제일 재밌었다고 했다. 아이들도 나만큼이나 좋은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다행이다. 태어나 가장 낯설고 힘든 일로 가득했던 한 해가 이렇게 저문다.
(이미지 출처=Freep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