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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덕 Mar 18. 2021

싸움의 정석




이 사진은 2020년부터 볼 "뻔" 했던 미국의 20달러 지폐다. 2016년 오바마 행정부는 여성 참정권이 확정된 지 100주년이 되는 2020년에 맞춰 20달러 지폐의 앞면을 여성 흑인 노예해방 운동가 해리엇 터브맨의 얼굴로 바꾸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뒤이어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무산됐다. 뿐만 아니라 트럼프 행정부는 2028년까지 새 지폐는 나오지 않을 것이며, 2026년까지 새 지폐의 얼굴이 누가 될지도 공표하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 2025년이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해였다면 가능했을 일이었다. 2021년 1월 트럼프의 재임을 저지하고 새 행정부의 수장이 된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보름만에 새 지폐를 준비하고 있다고 대변인을 통해 밝혔다. 새 지폐의 인쇄 날짜 위조 문제를 신속히 처리하겠다는 내용과 함께 지폐의 얼굴이 해리엇 터브맨으로 바뀔 것도 공개했다.

새 지폐의 얼굴이 될 해리엇 터브맨은 1822년경(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 수 없다) 메릴랜드주에서 3대째 대물림된 노예로 태어났다. 5~6세부터 가혹한 학대 속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그는 27세가 되던 해에 이미 노예제가 폐지되어있던 북부로 탈출한다. 혼자만의 자유를 찾는 데 그치지 않고 남부의 아프리칸 노예들을 북부로 탈출시키기 위해 비밀리에 움직이며 100여 명(최소 70~최대 300명으로 정확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상의 노예를 자유의 땅인 북부로 보낸다. 남북전쟁 당시에는 무장 군대를 이끌고 공격 작전을 수행한 최초의 여성으로 북부의 군인들에게 '터브맨 장군'으로 불렸다. 전쟁이 끝나고 노예제가 폐지된 후에도 그는 미국 땅에 사는 아프리카계 흑인과 여성들과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투쟁했다.

그렇다면 해리엇 터브맨이 밀어낼 20달러 지폐의 현재 얼굴은 누구일까? "글을 쓸 줄 아는 존 퀸시 아담스와 싸움을 할 줄 아는 앤드류 잭슨의 경쟁"으로 불린 1829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이겨 미국의 제7대 대통령이 된 앤드류 잭슨이다. 노예제를 찬성하고 백인 정착을 위해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몰아내는 정책을 폈다. 강제 이주 정책으로 4000여명의 아메리칸 원주민이 희생됐다. 그로부터 2세기가 지나갈 즈음 앤드류 잭슨의 초상화가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 다시 걸린다. 그를 영웅이라 칭했던 트럼프의 지시였다. 물론 이 초상화는 트럼프의 퇴거와 함께 2021년 1월 떼어졌다.

해리엇 터브맨이 앤드류 잭슨을 지우고 새 지폐의 얼굴로 등장하는 통쾌함은 그가 여성이고 흑인이며 인권운동가라는데 있다. 그러나 통쾌함에서 그치지 않을 더 중요한 의미는 이 일이 바이든 행정부의 여성, 인종 정책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과 해리스 부통령은 취임 전날 이미 미국 및 해외에서의 성차별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을 이끌 새로운 <백악관 성별 정책협의회> 구성을 발표한 바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없앴던 <백악관 여성과 소녀 위원회>를 더 세밀하게 되살려냄으로써 바이든 행정부 젠더 정책의 밑그림을 보여준 셈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노골적인 여성에 대한 적대감에 분노하던 이들에게 바이든의 승리는 정의의 승리로 비쳤다.

굴복을 요구받았으나 대결을 선택한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는 늘 설렌다. 1849년 복종 대신 싸움을 선택했던 흑인 노예 여성 해리엇 터브맨. 170여 년이 지나 백인 남성 대통령 앤드류 잭슨을 이긴다는 상상은 오늘 나의 싸움이 승패에 연연하지 않아도 좋을 충분한 이유다. 동시에 오늘 나의 싸움을 멈추지 않아야 할 더욱더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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