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식탁 Ep 03
아무리 나와 남편이 한 끼 식사를 챙겨 먹는 데에 또래 친구들에 비해 정성스러운 편이라 해도, 양가 어머니들에 비하면 부족하다.
서양 문화와 외식의 경험치에서 오는 메뉴의 범위가 조금 넓다는 것과, 그것에서 비롯된 새로운 요리에 대한 도전정신은 부모 세대를 앞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24절기에 따라 바뀌는 제철 음식들, 갖가지 풀과 열매에 대한 지식, 한국 전통의 소스 및 각종 조미료 등 아직 모르는 것이 한참이다.
그래서 내게 요리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이며, 지속 가능한 발전을 진정으로 지속 가능할 수 있는 별천지다.
현재 우리 부부의 신혼집 위치는 빛고을 광주광역시. 시댁은 차로 15분 거리에 위치해있다. 그리고 나의 고향이자 친정은 온고을 전주시.
나는 한 달에 2번 정도 친정에서 외박을 한다. 담당하고 있는 거래처들이 전라도의 크고 작은 도시에 포진되어 있기 때문에 격주에 한 번은 전주와 익산으로 출장을 가서 친정에서 하룻밤 외박을 하기 때문이다. 외근직에 종사하는 장점이자 단점이다. (아직 신혼이라 남편과 따로 자는 것이 마냥 기쁘진 않다는 의미) 이렇게 가끔씩 평일 저녁에 찾아오는 출가외인 맏딸을, 부모님과 동생들은 '하숙생'이라 부르며 반겨준다.
지난 3월 초였을까? 하룻밤 묵고 출근하려는 딸에게 친정엄마는 검정 봉다리를 손에 쥐어주었다.
"이게 뭐야?"
"쑥이야. 가져가서 국 끓여먹어. 엄마가 캐왔어."
"엄마가? 누구랑 캤어?"
"진자랑."
진자. 작년부터 다크호스처럼 떠오른 우리 엄마의 새로운 베스트 프렌드.
엄마는 진자 이모를 확실히 좋아한다.
"진자는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데도 아는 것이 정말 많아. 진자는 모르는 것이 없어. 전주 지천에 쑥이 어디에서 잘 자라는지 다 꿰고 있어. 온 세상의 풀떼기란 풀떼기 이름은 다 아는 것 같고. 어떻게 먹으면 맛있는지, 먹을 수 있는 건지 없는 건지도 다 안다? 진자는 심지어 운전도 잘해. 여행도 많이 해본 것 같아. 안 가본 곳이 없어. 진자가 저번에는 떡을 해왔는데 너무 맛있어서 다들 놀랬다니까?"
살면서 우리 엄마가 이토록 타인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을까... 이쯤 되니 이모에 대해 상당히 궁금해졌다.
"진자 이모 멋있네. 어떻게 그렇게 다 잘하셔?"
"아는 것도 많고, 아는 사람도 많고... 진자는 엄마랑 참 달라."
진자 이모는 젊었을 때 남편을 여의고 혼자서 자식들을 키워내셨단다. 덕분에 식당 설거지부터 시작해 건물 청소, 건설 현장 노동, 유치원 통학버스 기사, 주유소 운영 등 안 해본 일 없이 억척스럽고 알차게 지난날들을 살아오신 것. 우리 엄마 영숙 씨도 생활력이 강해 가계에 보탬이 될 일이라면 뭐든지 해오며 살아왔지만 그저 그뿐이었다는 것을 내심 부끄러워하신다. 주어진 일에만 충실했지, 내성적이고 정적인 성격으로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넓은 세상을 적극적으로 구경해보지 못했음에 늘 아쉬움이 많은 엄마다. 그런 엄마라서 활기와 에피소드가 넘치는 진자 이모가 더없이 좋았을까?
"진자 이모 멋있네. 앞으로 더 친하게 지내야겠네. 엄마! 나 늦겠다. 가볼게."
"조심히 다녀. 목 좀 따뜻하게 하고 다니고."
친구 이야기에 눈이 반짝거리는 '소녀 영숙'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보자니, 조금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황급히 집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와 얼른 신선한 야생의 쑥으로 된장국을 끓여보았다. 행여 차 안에서 시들까 싶어 엄마는 햇빛과 공기를 차단시키려 검은 봉지를 두 개나 꽁꽁 겹쳐서 싸줬더라. 봉지를 열자마자 초록빛으로 퍼져 나오는 쑥내음.
'더 달라고 할걸.'
역시 딸은 시집가면 도둑년이다.
쌀뜨물을 끓이고 시어머님이 센스 있게도 5:5의 비중으로 주신 집된장과 시판 된장을 섞어 곱게 풀었다.
이른 봄의 어린 쑥은 정말 다르구나. 끓는 물속에서 된장과 어우러지는 순간, 쑥향이 수증기를 휘감아 돌며 공중으로 매력을 발산한다.
"아아~ 향긋해라."
쑥된장국에 집중하고 싶어서 밑반찬을 소소하게 꺼내고, 두부를 뚝딱 썰어 구웠다. 달래 간장은 필수.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밥상이다. (나는 간이 세지 않고 담백한 한식 차림을 좋아한다.)
남편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꼬들밥과 국, 마른반찬을 본인의 소울푸드로 꼽는다. (2위 부대찌개, 3위 버거킹 와퍼.)
3월 말이 되었다. 쑥뿐만 아니라 냉이, 달래, 세발나물, 방풍나물 등 봄나물의 향연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시즌이 왔다. 올해 봄은 벚꽃이 완연하게 꽃봉오리를 터뜨리자마자 비가 내렸다. 3월 28일, 시어머님의 생신을 축하해드리려 시댁에 찾아간 날도 봄비가 촉촉하게 내렸다.
결혼하고 처음 맞이하는 시어머니의 생신이었지만, 어머님께서는 시외할머니의 건강이 염려스러워 집에서 간소하게 식사를 하자고 하셨다. 매번 찾아뵐 때마다 8첩 반상을 챙겨주시기 때문에 생신만큼은 근사한 식당, 혹은 신혼집에서 우리가 직접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는데......
"신윤아. 나한테 맛있는 것을 정 해주고 싶다면 미역국 하나만 끓여서 와.
내가 봄이니까 미나리랑 주꾸미랑 반찬 해놓을 테니 같이 먹자."
8첩 반상의 은혜를 미역국 하나로 쉽게 갚을 수 있다니! 우리 어머님과 동갑인 58년생 인플루언서, 심방골주부님의 유튜브를 참고하여 조금 더 특별하고 맛있는 '소고기 양지머리 미역국'을 준비했다.
맛있는 요리의 중요한 포인트는 결국 세 가지인 것 같다.
1. 신선한 식재료 2. 간 3. 정성
어시장도 아닌, 강원도 정선 오일장에서 사 온 미역이 아주 훌륭했다. 심방골주부님이 안내해준 정량을 잘 따르니 간도 완벽했다. 소고기를 볶지 않고 양지머리를 통째로 넣어 2시간이나 삶고 끓인 정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며늘아가가 끓여온 미역국에 어머님, 할머님, 남편 그리고 본인인 나까지 모두가 맛있다며 감탄했다. 어머님은 시그니처 메뉴 잡채와 예고하셨던 새콤한 주꾸미 미나리무침과 함께 '쑥전'까지 준비하셨다. 믿고 먹는 어머님 솜씨인지라 모든 메뉴가 맛있었지만, 쑥전이 기가 막혔다.
"어머님! 충격적이에요!"
어머님의 쑥전은 내가 여태 먹어본 쑥전과 달랐다.
비교를 위해 아래에 사진을 첨부한다.
사진으로 비교했지만, 맛은 비교할 수가 없다. 어머님의 쑥전을 처음 맛봤을 때, '금자'라는 우리 어머님의 이름을 따 '금자쑥전'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절대 과장이 아니다.
"그렇게 맛있어? 내가 쑥도 싸주고 만드는 법도 알려줄 테니까 집에서 한번 해봐."
어머님의 어깨너머로 배우고 직접 실습까지 하며 배우니, 이는 마치 명창의 수제자가, 명필의 문하생이 된 기분이 들어 한동안 흥분감을 감출 수 없었다. 어머님이 추가로 싸주신 쑥전은 모두 내 몫이었다. 맛있어서, 맛있는 비법을 알아내서 잔뜩 신난 아내에게 남편은 아주 기분 좋게 흔쾌히 전부를 양보해줬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먹었어서 익숙해. 그렇게 맛있어?"
"완전!"
지난 3월은 쑥 덕분에 행복했다. 향긋한 쑥을 이렇게 저렇게 먹으며 몸과 마음이 쑥쑥 자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쑥으로 사랑을 전해준 우리의 진자 씨, 영숙 씨, 금자 씨 덕분이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글을 빌려 표현하는 '쑥'스럼쟁이 신윤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