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식탁 Ep 04
우리 부부는 둘 다 평소에 정적인 편이지만, 상대적으로 동적인 분야가 조금 다르다.
남편은 신체능력 개발과 주변 정돈에 있어서 동적이다. 그는 30대에 들어서도 등산, 주짓수, 가라테, 마라톤 등 다양한 운동을 취미로 삼았던 사람이다. 그의 드레스룸과 화장대는 언제나 깔끔하게 정돈되어있고, 요리를 할 때에도 프로 셰프처럼 식재료와 도구들을 정리하면서 진행하는 요리와 정리의 멀티 플레이가 가능하다. 청소 역시 항상 그가 주도한다. (나의 역할은 주로 구석에 얌전히 앉아있거나 곁에서 도울 일이 없는지 쭈뼛대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과의 교류, 새로운 문화 체험과 장소 방문에 있어서 더 동적이다. 나는 몇 안 되는 친구들을 정기적으로 꾸준히 만나며 활기를 얻는다. 결혼하기 전에는 꾸준히 독서 모임, 인문학 스터디, 글쓰기 클래스 등 지적 유희 목적의 모임도 지속해왔다. 트렌드에도 민감해서 밈(meme)을 좋아하고, 신문물을 경험하기 위한 움직임에 부지런한 편이다. 진정한 핵인싸들에게는 비교할 바 못되지만, 계절마다 보고 싶은 전시회를 찾아가고 멋진 경험이 기대되는 장소가 있다면 시외로도 곧잘 벗어나는 편이다.
이러한 동적인 영역의 차이가 서로에게 잘 보완되는 편이다.
남편은 누워있는 내 손을 잡고 2:1 필라테스 레슨을 결제한다. 질서 있게 사는 삶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아름다운지 몸소 보여준다.
나는 그의 도슨트가 되어 전국에 숨어있는 새로운 세계를 소개한다. 친구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와 가장 재미있었던 사연을 실감 나게 재연한다.
(*주의 : 이 비교에 대한 집단과 모수는 전적으로 저희 둘 뿐입니다.)
지난주 2박 3일간 서울에서 나의 동적 에너지를 전부 소모했던지라, 이번 주는 집에서 조용하게 쉬고 싶었다. 내가 유일하게 생각한 주말 계획은 시외할머니의 생신을 축하해드리기 위한 토요일 점심시간의 시댁 방문, 약 서너 시간 정도의 외출뿐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일요일에 등산을 가고 싶어 했다. 주중에 사무실 좁은 의자에 185cm, 85kg의 거대한 그의 육신을 내내 맡기고 있었으니 좀이 쑤실 만도 하다. 나 역시 등산에 가기 적절한 날씨임을 인지하고 그의 의견에 따르고 싶었지만, 시댁에 다녀오고 영화관에서 액션 영화 <노바디>까지 관람하고 나니 피로도가 급증했다.
결국, 사고를 냈다. 영화관에서 계단을 2칸씩 까불대며 뛰어내려오다가 발목을 접질린 것이다. 비루한 육신이 등산 가기 싫은 마음을 눈치채고 아무래도 무리수를 던진 것 같다. 나잇값에 대해 생각한다. 드디어 계단을 점프하며 뛰어내려오는 짓을 관둘 때가 온 것이다. 아쉽지만 목숨이 더 중요하니 내가 양보해야지. (?)
그리하여 남편이 꿈꾸던 일요일의 등산은 나의 발목 부상과 함께 무산되었다. 일요일 아침에 눈을 뜨고 '무계획의 하루'를 막상 맞이하니 머쓱했다. 발목을 접질린 일이 미안하진 않았다. 나도 일부러 다치고 싶어서 다친 것은 아니니 결백하다.
그럼에도 겸연쩍은 심정은 달랠 길이 없었다. 내가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고, 아침에 눈이 이렇게도 잘 떠진 것을 보아하니 어쩌면 피로는 핑계였고 발목은 수단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묵묵히 집안의 질서를 찾기 위한 작업에 몰두 중이었다. (청소, 빨래, 정리정돈.)
미안하다는 말 대신 꺼낸 한마디.
"자기야. 우리 소풍 갈까?"
"으응...? 그래, 좋다!"
남편은 나의 소풍 제안에 흔쾌히 응수하였고 우리는 세수도 하지 않은 채 도시락 메뉴를 만들기 시작했다. 소풍 하면 도시락, 금강산도 식후경 아니겠는가! 부엌으로 돌진해 단호박 수프와 베이글 샌드위치를 바지런히 만들었다. 마실 것으로는 일명 'ABC주스'라는 사과 비트 당근주스와 따뜻한 커피를 곁들였다. 바리바리 싸들고 차지한 자리는 바로 조그만 인공 폭포 앞. 정말 금강산이 따로 없다.
운이 좋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신혼집은 조경이 꽤 아름다운 대단지 아파트다. '에버랜드 조경팀'이라 불리는 S건설사의 조경팀의 작업물이라고 하여 내심 기대했는데, 봄이 찾아오면서 그 진가가 드러났다. 퇴근 후 늦은 저녁, 단지를 관통해 장을 보러 가거나 산책하는 길에 각양각색 꽃들과 달빛에도 반짝이는 연둣빛 잎새에 감탄하며 "우리 언제 한번 도시락 싸서 정자 아래에서 먹자."며 나눴던 계획을 오늘에서야 실천하게 된 것이다.
수변공간 옆에 마련된 티하우스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삼삼오오 있었다. 세상에... 챙겨간 레이스 테이블보가 어쩜 테이블 사이즈랑 딱 맞더라. 음식도 맛있고 햇살도 따사롭고 흐르는 물소리도 상쾌했다. 바람이 상당히 불어서 날아다니는 티슈와 마스크를 주으러 뛰어다닌 것마저도 완벽한 피크닉이었다.
남편은 심지어 벤치에 누워서 낮잠도 청했다. 나는 곁에서 음악을 들었다.
Yumi Zouma - In Camera.
놀라운 사실 하나!
바로 지금 이 글을 써 내려가며 소풍의 BGM이 되어준 Yumi Zouma의 In Camera 앨범 커버 이미지를 첨부할까 하고 검색을 하다 발견했다. 이 곡의 뮤직비디오 장면이 상당히 유쾌하면서도 소름 끼치게 시의적절한 것이다.
대체로 활달하고 과감한 여자가 어딘가 수동적인 (혹은 당황한) 남자에게 역동적으로 매력을 어필하고 리드하는 내용인데, 여자는 내내 신나게 춤을 추고 남자는 천천히 그녀의 춤을 감상하고 즐긴다. 마치 엉뚱한 곳에서 발목을 다치고서는 신나게 소풍을 제안하는 나와, 그런 나를 사랑스럽게 응해주는 남편의 모습과 겹쳐 보여 웃음이 터졌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일부러 발목을 다친 것이 아님을 맹세한다. 다만, 엄살 부린 점은 솔직하게 밝히는 바이다.
누군가 한 명쯤은 이 글을 읽고 아파트, 혹은 가까운 공원의 소풍을 기분 좋게 꿈꿨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 아래의 BGM list를 추천하며 이만 물러선다.
1. 죠지 - Let's go picinic
2. Yumi zouma - In Camera
3. FKJ - Ylang Ylang
4. CHEEZE - Madeleine Love
5. 윤수일 - 아파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