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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윤 Jun 02. 2021

사랑과 우정의 키친 싱크 드라마

부부의 식탁 Ep 05


환생이 존재한다면, 내게는 다음 생에도 꼭 만나고 싶은 친구들이 있다.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 존재한다면, 감히 우리 셋이 아닐까 싶은... 낭랑 18세에 만난 다솜, 로운, 그리고 나, 우리는 삼총사다.

서로를 '용사들'이라 부르는 우리의 만남은 가끔 우정이 아니라 사랑일까 싶을 정도로 설렌다. 그 설렘은 15년째 식지도 않고 지속된다. 이 친구들과의 관계는 내게 진정한 우정의 기준이자 시발점이며, 마침표이자 가치관이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스무 살부터 더는 친구가 없어도 될 것처럼 관계에 목매지 않고 살아왔다. 다른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들으면 서운해할지도 모르겠으나, 어쩔 수 없다. 운 좋게도 10대에 소중한 친구들을 얻었고 진심으로 충만했다.


누구도 이들만큼 궁금하지 않았고, 누구도 이들만큼 비슷한 관심사를 다양하게 공유하지 못했고,
누구도 이들만큼 나의 결핍과 허영을 채워주지 못했다.


(겨우 겨우 한 사람 더 찾은 것이 '남편'이다.)


서른두 살이 되던 작년, 나는 삼총사 중 유일한 유부녀가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 주말, 지금은 각기 다른 도시에 살며 때로는 평화롭고 때로는 전투적인 일상을 보내던 '용사들'이 나의 신혼집에서 조우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 발 디딘 친구의 '신혼집'이라는 공간에서 모이는 생경하고 역사적인 순간을 성공적으로 빚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훌륭한 식사 대접'이 필요하다. 나와 남편은 저녁 식사 메뉴를 골똘히 생각했다. 장르는 양식으로 정했고, 자신 있는 요리와 처음 시도하는 요리를 적절히 섞어 준비하기로 했다. 주말이 오기 직전 목요일 저녁에 마트에서 장을 보았고, 미리 인터넷에서 파스타 소스와 신선한 새우도 주문해두었다. 그날의 메인 셰프는 남편이 맡기로 했다.

그렇다면 나는? 광주광역시에 처음 방문하는 친구들을 위해 가이드를 맡았지. 동선을 구체적으로 정했다. 토요일 한낮에 친구들이 도착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양림동과 동명동에서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고 산책하기로 했다. 그리고 해가 지기 전에, 적당히 배꼽시계에 시장기가 돌 무렵, 옆 동네에 위치한 우리의 '신혼집 테이블'로 자연스럽게 안내할 것이다.



(1)테이블 세팅의 핵심, 꽃은 야생 작약으로 준비 (2)에피타이저 Lemon Tofu는 미리 연습도 했다. (3)삼총사가 태국여행에서 먹었던 쥬스와 흡사한 Tipco 오렌지쥬스


손님을 초대하게 되면 부부는 메뉴 구상뿐만 아니라 테이블 세팅을 함께 준비한다.

먼저, 식탁을 변형한다. 우리 집 식탁은 간단하게 상판 추가와 조립을 통해 4인용 원탁에서 6인용 타원형으로 확장이 가능하다. 손님을 초대해 집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부부의 공통 니즈와, 평상시에는 작은 원탁으로 축소해 공간을 넓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니멀리스트인 남편의 니즈를 모두 충족할 수 있어서 고른 아이다.


두 번째로, 꽃을 준비한다. 5월의 식탁인 만큼 장미나 작약이 잘 어울리겠거니 생각하던 참에 마침 야생 작약을 공짜로 얻을 찬스가 생겼다. 지난 주말, 전남 화순에 모신 시외할아버지 산소로 벌초를 하러 가게 되었는데 남은 자투리 땅에 이름 모를 누군가가 심어 두신 작약꽃을 얻은 것이다. 어르신들은 뿌리를 쓰기 위해 심어둔 것이니 꽃을 마음껏 꺾어가라며 후한 인심을 나눠주셨다. 그러고 보니 남편은 연애 시절에도 이맘때쯤 벌초하러 돌아오는 길에 작약을 몇 송이 꺾어오곤 했다. (작약은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다.)


세 번째로, 테이블 조명을 바꾼다. 우리 부부는 냅킨이나 테이블 매트 같은 패브릭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고, 반짝이는 무드를 연출해줄 초나 촛대, 기타 오브제는 다소 위험하고 부산스럽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선택과 집중을 통해 그릇과 커트러리를 애초에 우아한 것으로 선택했다. (로얄 코펜하겐, 그리고 라귀올.) 조명은 평상시엔 하얀빛의 주광색 전구를 사용하지만, 손님과 함께하는 특별한 날엔 노랗고 따뜻한 전구색으로 교체한다. 이런 날만큼은 우리 집이 레스토랑인데, 초를 쓰지 않는다면 메인 조명이라도 당연히 전구색을 써야 하지 않겠나?



친구들이 찍어준 우리 부부. 두번째 집으로 이사를 간다면 싱크대와 타일을 꼭 무광으로...


테이블 세팅이 끝나고 애피타이저로 단골 가게에서 사 온 연어 샐러드, 버섯 샐러드와 직접 만든 연두부 레몬을 올렸다. 연두부 레몬은 뉴욕의 유명 레스토랑 애피타이저인데, 레몬 속을 파내고 연두부, 잣, 꿀, 레몬즙을 곱게 갈고 섞은 일종의 소스를 가득 담아낸 것이다. (물론 가보지 않았다. 가보고 싶은 마음을 담아낸 요리일 뿐.) 나는 흰쌀 위에 레몬을 올리고, 레몬 위에 직접 키운 바질을 올린 플레이팅을 제 멋대로 해설했다.


"흰쌀은 무병장수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건강을 항상 염원합니다."

"우와, 정말?"


박수와 감탄을 보낸 친구들은 여태 진짜인 줄 알겠지. 진짜는 아니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모두의 건강을 바라는 '진심'이었다.


최애 샐러드 가게에서 사온 버섯 샐러드와 무병장수의 아이콘. (살짝 나온 귀여운 친구들)


삼총사가 애피타이저를 감상하고 음미하는 동안, 메인 셰프는 서둘러 메인 디쉬를 준비했다.

새우와 브로콜리가 듬뿍 들어간 리가토니 크림 파스타, 비건 치아바타와 소시지를 많이 넣은 에그 인 헬, 자연산 두릅을 강조하고 싶은 베이컨 두릅 말이. 흔한 양식 메뉴지만 남편의 개성을 추가하여 세 가지로 준비했다. 파스타와 에그 인 헬은 남편의 주종목이지만, 베이컨 두릅말이는 처음 시도해본 요리였다. 두릅보다 덜 호불호가 갈릴 제철 아스파라거스를 활용하려고 했는데 시어머니께서 자연산 두릅을 주셔서 도전하게 된 케이스다. 두릅의 향이 진할 것을 예상하고 베이컨을 좀 더 두께감 있는 것으로 골라 똘똘 말아보았다.


친구들의 리액션은 훌륭했다. 파스타는 팔아도 될 것 같고, 에그 인 헬은 파는 것보다 더 맛있다며 '프로들의 기성 요리를 넘어서는 실력'임을 강조해주었다. 베이컨 두릅말이는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두릅의 향이 강해서 베이컨의 묵직한 육향을 뚫고 나왔는데, 친구들은 이미 배가 불러서인지 앞선 요리에 비해 큰 임팩트가 없어서인지 별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나와 남편만이 조용히 서로를 동시에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남편의 비유가 찰떡이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비싸게 파는 요리인데, 막상 먹어보니 맛있는지 잘 모르겠으나 맛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있어 보이는 맛'.  삼총사는 웃으며 크게 공감했다.


프로급의 메인 메뉴 2가지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있어보이는 맛의 베이컨 두릅말이.


우리는 가짓수로는 5가지의 요리를 모두 클리어한 뒤, 명치까지 차오르는 배부름을 어쩔 수 없이 또 망각하고 디저트 포크를 들었다.

중요한 메시지를 담은 디저트가 식탁 위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곧 캐나다로 떠난다. 삼총사에서 생일이 가장 빠르고, 키가 가장 크며, 길을 가장 잘 찾지만, 묘하게 베이비파우더 향기가 나는 다솜...

그렇다. 오늘은 나의 '신혼집 집들이'이자, 우리에게 잠시 이어질 작별(이란 말을 쓰고 싶지 않지만) 인사를 다솜이에게 건네는 날이기도 했다.

다솜이는 캐나다 토론토로 석사 과정을 밟기 위해 유학을 떠나기로 마음먹었고, 1년간의 준비 끝에 합격 통보를 받아 곧 출국할 예정이다. 우리는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다솜이가 자랑스럽고 대견하지만, 물리적인 거리를 생각하면 마음이 저릿하다. 한국에서도 각기 다른 도시에 살다 보니 계절에 한번 보곤 했는데, 그녀의 유학으로 우리는 당분간 언택트 우정을 나눠야겠지. 매일 떠드는 우리의 아지트 단체 채팅방이 정말 크나큰 위로가 된다.


나와 로운은 그녀를 잘 떠나보내야 하면서도, 보내기 싫은 마음을 작고 귀여운 케이크에 담았다.


다솜아 같이 가...


젤리를 좋아하는 친구들을 위해 지구젤리도 마트에서 미리 구비했다.


그 마음에 보답하기라도 한 듯, 다솜이는 아련한 눈빛으로 케이크와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며 이별이 아님을 이야기하다가 결국 맛있게 먹어주었다.

나도 같이 가고 싶은 심정을 위와 십이지장에 꼭꼭 눌러 담았다.


배부름을 해소하는 데는 끊임없는 수다가 가장 용한 법. 우리는 노을이 저물어갈 때부터 밤하늘이 새까맣게 탈 때까지 멈추지 않고 이야기하고 노래했다. 우리의 사랑과 우정, 현재와 미래, 기쁨과 슬픔, 꿈과 현실... 대화는 한없이 깊어졌다 얕아졌다 반복했지만, 바탕에는 구수한 해학과 신랄한 풍자라는 우리만의 '코드'가 늘 깔려있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나는 그들의 긍정을 향한 삶의 태도와 세련된 유머를 사랑한다.


우리는 열아홉에도 그랬고, 서른셋인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성향은 다르더라도 결국 긍정을 바라보고 낭만과 유머를 가진 비슷한 사람들을 각자 만나며 충실히 사랑하고 있다. 앞으로도 언제 어디서든 이렇게 각자의 하루를 살아낼 것이고, 이러한 우리의 삶에 간혹 그림자가 드리워질 지라도 고유의 빛이 소멸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나의 이러한 믿음과 확신이 곧 사랑과 우정의 증거임을 말해주고 싶다.


사랑해 친구들아.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해.

그리고 이 모든 걸 준비하고 함께 해준 남편도 사랑해.


5월 말, 토요일 저녁 시간은 내가 참 좋아하는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장르는 '키친 싱크 드라마', 분위기는 '러블리', 러닝타임은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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