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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윤 Aug 31. 2021

늙은이와 어린이, 그 사이.

양념무상 Ep 04


노인과의 대화는 가슴이 아리고, 아이와의 대화는 가슴이 아롱 댄다.



첫 번째 대화 : 늙은이를 만난 젊은이


어쩌다 보니 의료인은 아니지만 나의 일터는 대학병원이다. 그곳을 오가다 보면 어르신들이 종종 말을 건다. 대부분 미로처럼 느껴지실 길을 묻는 것이고, 간혹은 길이 아니라 정말 나를 궁금해하시기도 한다.

지난주 수요일에도 채혈실 앞에 앉아 아이패드로 마무리 작업을 하던 내게 어느 할아버지께서 불쑥 말을 건네셨다.


- 수납은 어디로 가야 혀?


할아버지가 들고 계신 종이에는 빨간 색연필로 숫자 1,2,3 순서가 적혀있었다. 그중 한 순서인 채혈을 안 하셨다고 해서 바로 뒤 채혈실에 함께 들어가 여쭤보니 수납부터 해야 한단다. 걸음이 느린 할아버지와 함께 수납 창구로 향했다.


- 할아버지 지갑 있으실까요? 계산해야 해요 이제.

- 별로 없는데. 10만 원뿐이여.

- 10만원으로 충분하실 수도 있어요. 일단 같이 가보 시게요.


걸어가며 종이를 천천히 살펴보니 다음 진료에 복부 C.T가 예약되어있었다. C.T는 무서운 단어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이미 80대의 당뇨 환자셨다.


- 할아버지, 다음에는 보호자랑 같이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없어. 다 객지에 나가 살고 근무하고… 바뻐… 혼자 와야햐.


창구에 도착하니 직원분이 단번에 알아보셨다.


- 어? 할아버지, 아까 내가 다~ 설명드렸는데? 오늘 돈이 모자라셔서 다음에 45만원! 여기 써드렸어요! 45만원! 갖고 오셔야 해~


상황을 파악하고 직원분의 브리핑을 내가 다시 설명드렸다. 써주신 색연필 글씨 중 정말 중요한 것은 더 진하게 표시했다.


- 보호자 아니시죠?

- 네.

- 착하셔라. 감사해요.


괜히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제대로 대답도 못 드리고 목례만 하고 뒤돌아섰다.


- 고마워요. (갑자기 존댓말 하심. 귀여움.)

- 아니에요. 할아버지 댁에 어떻게 가세요?

- 나는 오토바이 타고 왔어요. 어디로 가요?

- 저도 주차장 가서 차 타면 돼요. 할아버지 그래도 너무 정정하세요. 잘 걷고 오토바이도 타시고~

- 그래요? 오토바이가 편해. 얼른 가셔. 나는 천천히 갈랑게.

- 네~ 9월 3일에 꼭 45만원 챙겨서 와서 검사받으세요~!

- …… (대답 없이 가심 ㅋㅋㅋㅋㅋㅋㅋ)





두 번째 대화 : 어린이를 만난 젊은이



나는 출근하려고 지하 1층에 가던 길이었는데, 1층에서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탔다.


- 어? 지하로 내려가는 건데?

- 아… 괜찮아요.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갈게요.

- 그래 그러면. 몇 층 살아?

- 22층이요.


22층이면 ‘산이’가 살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 강산이. 몇 달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심심해서 말 걸었다가 만담을 나눴던 산이. 태권도 끝나고 헐레벌떡 뛰어왔길래 왜 뛰어왔냐고 물었더니, 누나가 집에 오기 전에 얼른 가서 유튜브 봐야 한다고 했던 산이. 누나가 오기 전까진 집에 1시간 동안 혼자 있어서 자유라던 산이 녀석…

자세히 보니 이 여자아이도 도복 바지를 입고 있다. 마스크를 썼지만 통통한 몸매와 홑꺼풀의 눈매가 산이와 비슷하다.


- 혹시… 산이 누나니?

- 네.


내가 자신의 존재를 맞춰도 놀라지도 않은 산이 누나. 범상치 않은 남매다.


- 강산이 누나구나! 나는 18층 살아. 이름이 뭐야?

- 연의요. 으ㅣ! (ㅢ 발음을 강조했다.)

- 강연의? 이름 멋지다! (지하 도착) 그럼 난 가볼게!

- …… (대답 못 듣고 문 닫힘ㅋㅋㅋㅋㅋㅋㅋ)


산이는 산이가 아니라, ‘산의’였을까?

산이가 산이인지, 산의인지 물어보기 위해 또 마주치고 싶다. 연의에게 산이가 너 오기 전에 유튜브 많이 보려고 죽자고 집에 뛰어온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짧게 스친 늙은이와의 대화와, 어린이와의 대화에 쉽게 감동하고 곱씹어보는 나는 여전히 푸르른 젊은이다. 나의 이 젊음이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유는 어린이를 지나쳐 늙은이를 향해 빠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겠지?


아… 영원히 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 영원히 늙은이와 어린이의 틈에서 대화를 나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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