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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윤 Mar 26. 2021

무릎을 껴안고

맛있는 고독 Ep 02


퇴근길에 들른 김밥집.

물컵을 꺼내려 전기 소독기 문을 연다. 가지런히 서있는 스테인리스 컵 사이로 맨 아랫줄에는 어린이용 뽀로로 플라스틱 컵이 있다. 괜히 노란 뽀로로 컵 하나를 꺼내 물을 받아 마신다.

헛웃음이 나온다.


라면 하나, 김밥 한 줄.

라면 위에 반숙 계란이 예뻐서 '찰칵.' 괜히 사진을 찍는다.


계란이 들어간 라면을 좋아합니다.




#퇴근 #혼밥 #반숙예술 #맛도예술 #맛스타그램


SNS 게시 완료.

한 젓가락 올리려는데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다.

"맛있냐? 웬일로 인스타야."

"아놔. 아직 한입도 안 먹었다고."

"아하하하. 먹지도 않고 맛이 예술이냐? 면발 불겠다. 다 먹고 전화해."




국물까지 들이켰는데 입이 또 심심하다.

괜히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사서 걸어간다.

다시 전화가 걸려온다.




"아직도 먹고 있냐."

"맥주 좀 샀다."

"소주파의 배신이네? 내일 정현이 결혼식 가지?"

"응. 너도 올 거 아니야."

"내일 근무 잡혔어. 휴... 축의 좀 부탁하자."

"이런... 얼마?"

"10만 원."




샤워하고 캔맥주 하나를 까면서 정현이의 모바일 청첩장을 확인한다. 내일 오후 1시가 맞다.

괜히 웨딩 사진을 들여다본다. 오래전 마주쳤을 때보다 예뻐진 듯한 신부, 정현이 답지 않은 어색한 미소,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


'웨딩촬영 참 피곤하겠다.'


오늘따라 안 하던 짓을 한다.

뽀로로 컵, 인스타그램, 맥주, 남의 웨딩 사진 들여다보기...

젠장. 외롭다는 증거를 몽땅 만든 기분이다.




오늘은 불타는 금요일, 불 꺼진 방 안의 시린 옆구리는 거위털 이불로도 데워지지 않는다.

무릎을 껴안고 겨우 잠이 든다.








2018년 10월 12일에 fiction으로 적었던 짧은 글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뽀로로 컵을 집어 들었던 것까진 nonfiction이다. 결혼하기 전 자취 시절의 나는 음식을 자주 해 먹지 않았고, 유난히 지쳤던 금요일의 마지막 끼니를 분식집에서 대충 때우며 휴대폰 메모장에 떠오르는 대로 엄지로 꾹꾹 글을 적었던 것이다.

 

우리가 매번 즐거운 금요일만 만나는 것이 아니기에 인생에는 즐겁지 않은 금요일이 불쑥 자주도 등장하지만, 때로는 금요일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알 수 없는 해소를 맞이한다.


그리고... 밥벌이의 해소가 지나간 자리에는 또 알 수 없는 허기가 자리한다.


라면, 맥주, 무릎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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