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2022)


영화를 좋아한다. 아니 좋아했다? 글쎄다라며 알 수 없게 되었다.(당분간 결정을 보류한다)

1년에 300여 편을 미친 듯이 개봉관 재개봉관 예술관 등을 헤매 다니며 보기도 했을 만큼 빠져들었던 시절도 있었다. 은희경의 소설 '태연한 인생'이 생각난다.  뭔가 답답하고 막막한 주인공 류의 엄마는 그 시절, 주인공을 데리고 영화관에 가는 것으로 상황을 잠시 지연하거나 참아내는 것으로 보이는 장면이 있다. 내가 영화를 미친 듯이 보던 시절을 생각하면 꼭 그 장면이 떠오른다. 내게 영화도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막연하게 생각한다.


 지금은 영화를 볼 환경이 열악하다. 극장 접근성이 떨어진다. 영화 하나 보겠다고 가기 어렵다. 그렇기도 하고, 영화를 볼 만큼의 시간적인 여유도 부족하다. 어쩌면 다 핑계이고 영화가 아니어도 나를 몰입시킬 무언가가 있다 보니, 영화는 자꾸 선택에서 우선순위가 밀렸다.


 그러고 보면 나는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영화 없어도 살 수 있으니까.


 그래도, 연말이 되면 좀 아쉽다. 올해도 제대로 영화를 못 봤네....라는 생각. 아카데미 시상식을 공감하며 보지 못하는 것 등등, 모든 걸 다 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서 좋은 영화 한꺼번에 상영하고 해설해 주는 메가박스 행사에 관심을 갖지만, 지역 거주자는 힘들다. 방학을 하면, 나는 육지에 가서 지내게 될까,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이젠 가고싶지 않다, 그냥 나는 여기에서 지내고싶다는 마음이 크다. 


 2024년 메가박스 시네마리플레이 상영작 라인업

 노 베어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추락의 해부, 퍼펙트 데이즈,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클로즈 유어 아이즈, 존 오브 인터레스트, 몬스터, 룸 넥스트 도어, 아노라 


 영화를 본다는 것이 많은 것을 말해주지만(경제적 정신적 육체적 취미적 여유 같은 것),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 또한 많은 것을 말해준다.



라플위클리 토크 시즌2 4화 - 코미디




멀티버스 세계관

수많은 정보 속에서 허우적 대는 현대인의 모습을 은유한 영화



라이프플러스, 에에올 영화를 설명하는 부분  (47'23"-50'58)

 이 영화는 눈물도 극단으로 가고 웃음도 극단으로 가고, 극단으로 간다는 얘기는 너무 표현을 잘한다는 얘기.

아니 어떻게 영화 속에 수분 동안 돌 두 개만 갖다 놓고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깊게 사로잡을 수 있을까.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거든요. 

이 영화가 3부처럼 구성되어 있잖아요. 3부로 구성된 각 부분마다 각각 부가 어떻게 시작되냐면 영수증을 정리하면서 시작하거든요. 영수증을 정리하는 이유는 국세청에 가서 내가 이러저러한 비용을  썼으니까 세금을 감면해 달라고 하는데 국세청에서는 안 받아들여줘요. 어떻게 생각하면 통과시키기 위해서 영수증을 세 번 정리하는 이야기예요. 근데 이게 왜 중요하나면 영수증을 정리하려면 내가 비용을 쓴 걸 가지고 인정을 받아야 되잖아요. 국세청 시스템에서. 근데 인정을 안 해주거든요, 국세청에서. 이때 내가 쓴 비용이라는 건, 내가 인생을 위해서 목표를 위해서 했던 노력들인 거예요. 나는 이런 노력했고 저런 노력했고. 이런 노력을 말하자면 시스템이나 신한테 가서 '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다 인정을 안 해줘요. 일종의 증빙을 보여주는데 다 안 통하는 거죠. 본인은 너무 억울하잖아요, 난 이렇게 노력을 했는데. 근데 이렇게 노력한 사람이 노력을 그대로 다 보상받을 수 있는 멀티버스 속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래서 모든 걸 다 이뤄요. 딸만 이루는 게 아니라  엄마(양자경)도 이뤄요. 근데 모든 걸 다 이루고 나니까 허무해져요. 왜냐하면 모든 것들이 다 필연적인 것이 되기 때문에 해야 될 이유가 없어요.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다면 그걸 이룬다는 게 이유가 없잖아요. 선택의 의미도 없고. 그러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가장 전능한 주인공이 돼서 모든 걸 다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걸 마지막으로 귀결되는 것은 가장 못나 보이는 그 주인공한테 가서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끝난단 말이죠. 원래의 나, 그게 가장 좋은 선택이 되죠. 

 통계적인 필연성이라는 것 속에서 절망에 부딪친 사람 얘기거든요. 통계적인 필연성이 가장 확실한 인간에게 사건이 뭔가 하면 죽음이란 마리에요. 모든 사람이 다 죽으니까. 그래서 절망해서 극 중의 딸이 자살하려고 하는 건데 근데 그 영화를 보면 통계적인 필연성에서 가장 멀리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사건 그걸 해야 다른 세계로 갈 수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게 되는데 이게 영화적으로 너무 말이 돼요.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하잖아요(동진). 그 행동을 몰래 티 안 나게 해야 되니까 더 웃기잖아요(연모). 더군다나 이 행동을 하는 것 자체가 대부분 다 장난 같고 말도 안 되는 상황 같은데 이영화를 다 보고 나면 결국은 부부 사이든 세상이든 그 관계를 구원하는 것은 이념도 아니고 꿈도 아니고 사소한 농담, 수다, 장난. 어떻게 보면 수다라든지 장난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이렇게 말하는 영화거든요. 친절(연모), 다정함 이런 측면에서 코미디의 맥락 자체가 웃기기도 하고 눈으로도 웃기고 그러면서 너무 말이 되고, 이런 측면에서 저는 정말로 코미디 걸작이라고 생각해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책, 그것만이 내 세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