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 하나에 꾸려진 옹골찬 세계
날씨가 화창한 주말 아침에는 왜인지 싱그럽고 소담한 ‘원플레이트 식사’가 끌립니다. 브런치 플레이트든 채소 플레이트든 단 하나의 접시 위에 싱싱한 샐러드와 과일, 빵과 주먹밥, 나물 따위가 어우러진 담백한 식사 말이에요. 소박하지만 조촐하진 않은, 한상차림이 아닌 한그릇차림. 주말에는 도서관을 가거나 카페에 향하기 전, 그런 식사를 찾아 고즈넉한 동네를 두리번거립니다.
지난 주말에는 이틀 내내 동료 J님과 함께 서울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후암동과 한남동, 서촌에서 북촌에 이르기까지 만나서 점심을 먹고 해가 지기 전까지 땡볕 아래를 걸으며 카페와 쇼룸 곳곳을 탐방했습니다. 토요일 이른 점심, 우리는 후암동의 ’모닝러버‘들이 모이는 ’아침 프로비전‘에서 만났습니다. 새가 그려진 귀여운 손그림 간판이 걸린 노란 건물로 들어서면 3층에 ’마다밀‘이라는 아담한 제철 식당이 아침부터 조용히 분주합니다.
계절‘마다’ 꼭 먹어야 하는 재료로 차린 식사’
그런 이름의 뜻을 가진 마다밀에서 우리는 8월의 제철 플레이트를 나란히 주문했습니다. 깻잎 페스토 파스타, 맵싸한 꽈리고추가 들어간 타코, 무화과를 총총총 얹은 샐러드, 고소한 오이지 주먹밥(정말이지 쫄깃(?)하고 고소했답니다), 구운 가지 브루스케타, 참나물 치미추리 소스가 버무려진 애호박 스테이크... 접시 위에 올라간 메뉴 이름만 나열했는데도 벌써 한두 문장이 두둑이 채워집니다.
원플레이트의 가슴 떨리는 매력은 역시 여러 가지 종류의 음식을 조금씩 체험한다는 데 있는 것이겠지요. 비록 젓가락질은 바빠질지라도 한 뚝배기, 한 사발, 한 정식이 아니라 한 숟갈씩, 한 움큼씩, 한 입씩 마치 참새처럼 입을 오물거립니다. 입 안에서 차례차례 어우러지는 여러 가지 식재료의 맛과 향의 통통 튀는 앙상블을 즐기는 묘미가 있습니다.
주먹밥의 쫄깃한 식감에 취해 있다가 파스타의 탱글한 식감을 입 안 가득 음미하고, 새콤달콤한 과일을 먹었다가 알싸한 타코를 한 입 베어 물고, 깻잎과 참나물의 고소한 향을 느끼다가 사워크림과 토마토소스의 이국적인 향으로 넘어갑니다. 원플레이트가 식탁 위에 서빙되는 순간은 마치 놀이동산에 들어온 순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곳곳을 헤집어 뛰노는 기분으로 접시 위의 세계를 한바탕 탐험하고 나면, 어느새 기분 좋은 기진맥진함과 함께 담백한 여운이 남습니다. 건강한 식재료들로 꾸려진 덕에 무엇보다 속이 더부룩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깨끗이 비워진 접시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풍경은 단순해서 기분이 좋습니다.
일요일, 서촌에서 만난 우리는 또 ‘원플레이트 식사’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아침부터 아이부터 외국인까지 삼삼오오 북적거리는 브런치 식당 ’애즈라이크‘를 찾았습니다. J님은 리코타치즈와 베이컨이 올라간 샌드위치 플레이트, 저는 새우와 아보카도가 올라간 샌드위치 플레이트를 먹었습니다. 플레이트 위에는 감자도 있고 샐러드도 있고 아스파라거스도 있고, 계란과 버섯, 선드라이 토마토도 있습니다. 부지런히 칼질을 하고 포크를 움직이다 문득 J님께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어제도 오늘도 이런 원플레이트 점심이네요.“
“오, 그렇네요.“
“...그런데 이런 원플레이트 식사, 꽤 좋지 않나요?”
“맞아요. 여러 가지를 조금씩 골고루 먹을 수 있다는 게.”
“심지어 설거지거리도 하나만 나오고요(웃음).“
사실 ’원플레이트’의 미학을 의식하게 된 것은 그보다 한 주 전, 우연히 친구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었던 날입니다. 일요일 오후, 문득 무료해져 누구랑 같이 밥이나 먹을까 싶어 찾아간 저에게 친구는 고향의 엄마가 쟁여주고 간 밑반찬으로 한 그릇을 뚝딱 차려주었습니다. 접시 한 개에 여러 가지 밑반찬을 담아서 말입니다. 어묵스팸볶음, 미역줄기, 감자채볶음, 애호박무침, 깻잎조림, 마늘쫑까지. 반찬그릇에 하나씩 나눠 담지 않고 널찍한 그릇 하나에 옹골차게 담아준 그 모습이 왜인지 정다워서 그 상차림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면 설거지도 편하겠구나, 자취를 하는 사람의 시선에서 고개도 끄덕이면서요.
맛볼 식재료는 손가락을 모두 꼽을 정도로 다양한데, 필요한 그릇은 넓고 둥그스름한 접시 단 하나. 이 얼마나 담백하고 쿨한 느낌인지요. 중요한 것은 접시 위에 올라가는 무궁무진한 라인업의 식재료,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들이야말로 주연이라고 등 떠미는 듯한 느낌입니다.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골라 한 움큼씩 채워 나만의 식세계를 꾸려나간다는 큐레이션에서 오는 뿌듯함도 듭니다.
일본의 치히로 상이라는 어느 집밥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하고 있는데요. 그녀의 피드는 매일 구성이 바뀌는 원플레이트 식사로 탐스럽게 채워져 있습니다. 밥과 계란말이, 튀김 요리와 상추, 배. 또 어떤 날은 소시지와 토마토, 오이샐러드와 파이. 또 다른 날은 초당옥수수와 연어구이, 버섯무침. 이외에도 샌드위치와 호박수프, 오니기리 등 일본의 가정식에서 서양의 브런치, 디저트에 이르는 메뉴들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런 치히로 상의 정갈한 상차림을 보며 나는 어떤 재료로 나만의 데일리 원플레이트를 구성해 볼까 설레는 고민도 해 봅니다. 매일 새로운 걸 만들기에는 빠듯하니, 시그니처 식재료가 있고 가끔씩 기분이나 계절에 따라 변주할 수 있는 샐러드나 과일을 도전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달걀로는 반숙이나 스크램블에그, 계란말이를 만들 수 있고 파스타는 시판 소스나 로컬 마르쉐에서 얻어 온 페스토만 버무려서 간단히 만들 수 있는 걸로, 참기름과 제철 나물로 만든 주먹밥 그리고 단백질을 위한 두부나 닭가슴살, 토마토와 샐러드... 이런 식으로 상상에 날개를 달아봅니다. 덤으로 마음에 드는 널따란 그릇 하나도 구비해 보고요.
이런 데일리 원플레이트를 떠올리면 ’소담하다‘는 느낌이 떠오릅니다. ’소담함‘이라는 말의 뜻은 ’생김새가 탐스럽다‘, ’음식이 풍족하여 먹음직스럽다‘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attractive'와 'delicious'.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고 맛있다는 뜻입니다. 음식도 곧 사람과 같아서 여러 가지 인상을 줍니다. 진국인 사람도 곁에 두면 든든하고 여러 가지 매력이 파도 파도 나와 질리지 않는 사람도 곁에 두면 즐겁습니다. 깊은 육수로 진한 여운을 주는 국밥 같은 요리가 전자라면, 원플레이트란 그런 후자 같은 요리가 아닐까요?
햇볕이 좋은 한가로운 주말에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원플레이트 식사에 도전해 봅시다. 친구와 만나기로 한 동네의 작은 식당을 찾아가도 좋고, 장을 봐서 직접 나만의 원플레이트 식사를 꾸려봐도 좋겠습니다. 일상 속에서 지나치기 쉬웠던 옹골차고 소담한 식재료의 세계를 탐험하는 시간을 가져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