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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시 Sep 22. 2024

잊고 있던 아날로그의 소리들

우리가 겪고 있는 건 과정의 상실

현대에 물건들은 과하게 고요하고 부드럽다. 그런 이야기를 했던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조금 옛 물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에게는 필름카메라가 하나 있습니다. 지난여름, 당근으로 4만 원에 구매한 미놀타 카메라입니다. 조금은 투박한 생김새지만 작고 귀여운 이 물건은 어느덧 볕이 좋은 날이나 어딘가로 훌쩍 떠날 때 늘 어깨에 메고 나서는 반려 물건이 되었습니다. 추석 연휴 전에 엄마랑 단 둘이 부안 여행에 다녀왔을 때도 동행한 친구입니다.


한적하고 푸르른 절, 내소사의 길을 걸으며 엄마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버튼을 눌러야 해, 라며 아는 듯이 떠들었지만 실은 필름카메라 세대였던 엄마에게 더 친숙한 물건일 테지요. 능숙하게 카메라를 쥐고 곧게 뻗은 나무 사이에 선 저를 예쁘게 찍어주었습니다.


찰칵


지르르릉.

또는 고로고로.

아니면 골골골(?)


이런 소리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버튼이 눌리는 소리와 함께 필름이 한컷 감기는 둔탁하고도 고른 소리가 들렸습니다. 엄마는 “옛날에 찍을 때 나던 소리다“ 하며 아이처럼 반가워했습니다. 맞아, 나도 그 소리가 좋더라고. 암. 속으로 맞장구를 치며 히히 웃었습니다. 왠지 내가 방금 풍경 하나를 담았고, 이 까만 물건 안에 든든히 잘 보관했다는 실감이 나지요.



엄마의 필름카메라에서 나는 소리에 대한 예찬(?)은 다음날 새 필름을 갈아 끼울 때도 또 한 번 있었습니다. 뒷 뚜껑을 열어 필름을 장착하고, 필름이 잘 감겨 컷수가 36에서 1로 돌아오는 10초 남짓한 시간. 아주 작은 난쟁이 세상에 있는 어느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가 섬세하게 돌아가는 듯한 간지러운 소리가 숙소 안을 채웠습니다. 엄마는 침대에 누워 또 한 번 반가워합니다. “옛날에 이런 소리 자주 들렸는데.“


맞아. 옛날의 물건에는 소리가 있구나. 문득 생각했습니다. 현대의 편리한 물건에 비해 생김새도 투박하고 손이 많이 가고 기능도 단순한 이 장난감 같은 물건에는, 가만 보면 다채롭고 풍성한 멜로디가 있는 것입니다. 레버를 올려 렌즈를 열 때 착, 하는 맑고 세련된 소리, 빨간 버튼을 눌러 렌즈를 바꿀 때 나는 샤릉- 거리는 소리, 필름을 꺼낼 때 뒷뚜껑이 핑-하고 가볍게 튀어나오는 소리, 아까 묘사한 것처럼 필름을 감을 때 아주 작고 섬세한 컨베이어벨트가 고르게 돌아가는 소리...


방에 있는 탁상시계


그런 아날로그의 소리, 라고 하니 또 다른 소리가 떠오릅니다. 제 방에 있는 탁상시계인데요. 시간을 확인할 때마다 일일이 휴대폰을 켜기 싫어 자명종 겸 놓아둔 무소음 아날로그 탁상시계는 평소에는 무척 고요합니다. 잘 때도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지요. 하지만 가끔씩 냉장고도 멈추고 에어컨도 멈춘 적막 속에서 침대에서 가만히 있다 보면 어디선가 마치 작은 벌레가 속닥거리는 듯한 은밀하고도 단정한 소리가 들립니다. 출처를 따라가다 보면 그 탁상시계가 태연하게 시침을 돌리고 있지요. 참 부지런하구나, 하고 애틋하게 느껴집니다.


샤프 대신 연필을 쓰는 저로서는 사각거리는 소리도 좋아합니다. 한 획을 종이에 그을 때마다 정직하게 손을 타고 느껴지는 담백한 떨림과 삭-, 하는 가볍고 경쾌한 소리. 한 글자씩 한 글자씩 꼼수 부리지 않고 종이를 채워나간다는 기분이 듭니다. 키보드로 타이핑할 때는 어떤 글자를 치든 똑같은 소리가 납니다. 하지만 종이 위에 연필로 직접 글자를 그릴 땐 ㅇ, ㄹ, ㅂ, ㅅ 등 글자의 모양과 획의 길고 짧기, 그 순간의 나의 호흡에 따라 매번 다른 소리가 납니다.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글을 쓰는 동작보다 그 소리를 듣는 것에 마음이 뺏겨 ’정보성 있는 글을 기입‘하는 것이 아니라 ’쓰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게 되는 순간도 마주합니다.


사실 연필 대신 샤프를 쓰면 손도 덜 아프겠지요. 디지털시계를 놓아두면 60번의 시침 소리를 듣지 않고도 1분 단위로 정확한 시간을 안내해 주고요. 디지털카메라를 쓰면 필름값과 스캔값도 아낄 수 있고 36장을 다 찍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다. 매끄럽고 날렵하며, 조용하고 부드럽고, 가볍고 신속합니다. 하지만 쓰는지 갈기는지(?) 모르는 사이 글이 쓰여지고, 시침이 가는지 어떤지도 모르는 사이 시간이 훌쩍 가 있고, 풍경을 포착하는지 쓸어 담는지(?) 모르는 사이 수백 장의 사진이 앨범에 담기는 일은 때로 ‘텅 빈 풍요‘처럼 느껴집니다.


필름카메라로 포착한 풍경들


소리의 존재는 무언가를 마치 슬로우 모션으로 보듯이 아주 찬찬히, 투명하게 느끼게끔 합니다. 연필을 쥘 땐 손의 힘을 섬세하게 조절해 가며 종이와 흑연이 만나는 감촉을 느끼며 글자를 한 글자씩 새겨나가는 감각을 느낍니다. 필름을 사고 패키지를 뜯고 카메라에 장착해, 36컷에 걸쳐 버튼을 꾹 눌러가며 신중히 풍경을 수집합니다. 카메라의 내부나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는지는 몰라도, 필름에 상이 맺히고 한 컷씩 넘어가고 필름이 데굴데굴 감기는 소리를 통해 일련의 과정을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귀로, 손으로, 마음으로 느끼고 상상할 수 있지요.


내가 지금 쓰고 있구나.

내가 지금 찍고 있구나.

내가 지금 듣고 있구나.


필름이 데굴데굴 감기고 있구나.

시곗바늘이 똑딱똑딱 움직이고 있구나.



무언가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한 실감. 그것이 현대 사회의 일상에는 부족해진 것입니다. 물건들이 편리해지고 기계 구조가 더욱 정밀해져 모든 것이 너무도 매끄럽게 처리되는 일상이니까요.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휴대폰 스크린 위에서 손가락 두 번 정도의 터치면 충분합니다. 음악을 듣기 위해서도 어플을 한 번 누르고 좋아하는 노래를 누르면 노래가 재생되지요. 무언가를 준비하고 경험하고 마무리 짓는 모든 과정을 치르는 동안 우리가 느낀 감각이라곤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스크린을 터치한 소리 없는 감각뿐입니다. 어떤 과정을 통해 사진이 찍히고 음악이 재생되는지 실감할 새 없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결과가 짠, 등장해 버리는, 우리는 이른바 과정의 상실을 겪는 중입니다.


물건 하나를 다루는 데는 들여다보면 꽤 다채로운 동작들이 있습니다. 꺼내고 누르고 밀고 올리고 얹고 열고 돌리고... 그 밖에도 특정한 상점이나 가게를 오가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필름현상소처럼요) 그 물건으로 행하는 동작들이 단순화되고 사라질수록 그 물건과 교감할 수 있는 풍요로운 경험도 하나하나 잃어가는 것이려니 생각하면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단순하지만 일상 속 동작들을 더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에서 모종의 마음챙김을 할 수도 있답니다. 실제로 명상 방법 중에는 소리를 듣는 종류가 있다고도 하지요. 모든 것이 너무도 자동으로 처리되는 일상을 경계하는 마음으로, 풍요로운 과정을 상기시키는 다채로운 멜로디를 찾아보도록 합시다.


책장을 사라락 넘기는 소리, 글자를 끄적이는 소리, 뚜껑을 여닫는 소리. 그 은밀한 소리들의 거처는 의외로 평범하고 단순한 물건들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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