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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시 Nov 17. 2024

먼저 찻잔부터 데웁니다

차를 우린다는 것의 의미

카페를 두 번 옮겼지만 좀처럼 첫 문장이 써지지 않는 늦가을의 어느 일요일 오후입니다. 창밖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아도, 따뜻한 라떼 한 잔을 홀짝여도, 수첩에 적어 둔 단어들을 바라보아도 마음은 딴 데로 가 있는지 괜히 빈 종이 위에서 펜만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꼭 써야 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조급해지려던 순간 수첩 위에 적어 둔 말과 만났습니다.

먼저 찻잔을 데운다.

그 한 마디가 저를 어떤 하루로 데려다 놓았습니다. 때는 10월 중순의 이른 아침, 미팅을 하러 연희동의 한 티룸을 방문한 날입니다. 제가 일하는 브랜드의 꿀을 활용해 선보이는 다과 티 코스를 시음하기 위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온화한 인상의 대표님께서는 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고운 빛깔의 다기와 향긋한 찻잎들을 준비하시고선 천천히 차를 우려주셨습니다.



고요하고 능숙한 손길을 감상하는데 문득 특이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찻주전자에 먼저 뜨거운 물을 따르더니 바로 옆에 있는 빈 컵에 또르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 후 다시 빈 찻주전자에 찻잎을 넣고 뚜껑을 덮은 뒤 마치 부채질하듯 찰랑찰랑 흔드셨습니다.

이 동작이 그 티룸에서 차를 우리는 방식이었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였더니 이렇습니다. 따뜻한 차를 내어주기 전에 먼저 찻주전자를 뜨거운 물로 한 번 헹구면 찻주전자가 딱 알맞게 데워집니다. 그렇게 온기가 가득 찬 찻주전자 안에 찻잎을 넣고 흔들면 내부에 차의 향이 고르게 뱁니다. 그렇게 해서 찻주전자는 차를 우리기 전부터 이미 따뜻하고 향기로운 상태가 됩니다.

그 동작을 따라가면서 저는 비로소 차를 우린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우린다는 것은 어떤 것의 빛깔이나 맛, 고유한 내용을 서서히 빠져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적합한 상태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따뜻한 차를 내어주기 위해서 먼저 찻주전자를 따뜻하게 데웁니다. 차를 우리기 전에 찻주전자에 찻잎의 향을 입힙니다. 마찬가지로 단정하고 온화한 글을 쓰기 전에는 단정하고 온화한 단어들을 봅니다. 생활에 대한 글을 쓰기 전에는 먼저 생활을 천천히 돌아보고 그 안에 머뭅니다. 그러한 다가감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것을 하기 위해선 그러한 상태를 먼저 만듭니다. 글을 쓰기 위해선 하루하루 읽는 생활도 필요합니다. 상냥한 마음을 갖고 싶다면 그런 글과 말이 깃든 곳, 예를 들면 자극적인 뉴스나 SNS의 댓글창이 아닌 상냥한 이야기가 가득한 책이나 영화나 카페를 자주 찾아야 합니다.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면 메일함이나 모니터에서 잠시 멀어져 침구를 가지런히 정돈하고 그릇을 깨끗이 닦고 음식을 맛있게 먹어야 합니다.

바로 그런 것들, 그런 느리고 온화한 우림이 요즘의 일상에 부족했던 것입니다. 11월이 무르익는 요즘, 연말에 준비된 것들이 많아 자꾸만 마음이 그곳에 가 있는 시기입니다. 천천히 책을 읽고, 집 안의 소소한 일거리를 돌보고, 기분 좋은 것들과 편안히 휴식을 취하는 나날이 없어지면서 오늘 갑자기 차를 우리려 하자 떫고 식은 맛이 날뿐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제가 다시 준비하려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위해 이런 말들은 잠시 한쪽에 숨겨 놓습니다. 후딱 해버리자. 단숨에 끝내버리자. 기분 좋은 것을 우리기 위해서는 먼저 기분 좋은 상태를 만드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런 과정에 필요한 것은 순한 마음입니다. 순하다는 것은 과격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급히 하려는 마음, 갑자기 하려는 마음, 재촉하고 내모는 마음. 오늘은 잠시 멈춰두고 먼저 순한 것들을 곁에 둬 볼까 합니다. 따뜻한 커피 한 잔, 어제 먼 동네에서 사 온 쑥 쿠키, 카페에서 흐르는 재즈 음악. 그리고 단정한 글을 쓰게 해 주는 책 한 권 말입니다.

추신. 글 쓰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마음으로 종종 하는 루틴은 평소엔 이런 책 저런 책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읽다가도 <오늘의 기본>을 쓸 땐 삶의 철학과 문체를 닮고 싶은 작가의 책을 읽는 것입니다. 그분의 문장들을 한 줄씩 읽는 동안 제 안의 글그릇이 딱 맞는 온도로 데워져, 글을 쓰는 순간 따뜻하고 향기로운 문장들이 우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우리고 싶어 어떤 시간들을 갖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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