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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시 Dec 21. 2024

집 안에 꽃병이 있는 풍경

온화한 마음이 놓인 집

지난 글에 이어 오늘도 교토 여행의 이야기입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온화했던 공간을 꼽자면 가와이 간지로 기념관이 아닐까 싶습니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유명한 청수사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골목, 소박한 주택들 사이에 조용히 자리한 곳입니다. 지금은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도예가였던 그가 직접 설계하고 머물렀던 저택이기도 합니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차분하지만, 창으로부터 새어 들어오는 빛 덕분에 환하고 부드러운 공간입니다. 흙을 만졌던 그의 섬세한 손길이 곳곳에 녹아 있어, 여전히 편안한 집 같은 분위기입니다. 오래된 목조 가옥임에도 불구하고 큰 난로가 있어 공기가 따뜻하고 그 아래선 고양이 한 마리가 식빵을 굽고 있습니다. 그 주위로 관람객들은 곳곳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거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전시장 안의 자료들을 살펴봅니다. 엄숙한 자세로 감상해야 하는 기념관이 아니라 누구에게든 다정하게 열려 있는 이 공간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한때 가와이 간지로가 앉았을 작은 책상에 앉아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책상 위에는 분홍색 꽃이 꽂힌 투명한 푸른 병이 놓여 있었습니다. 둘러보니 책상 위뿐만 아니라 집 안 곳곳에 서로 다른 꽃들이 도자기나 꽃병에 꽂혀 놓여 있었습니다. 창틀과 모서리, 응접실 탁상의 가운데, 별채의 창가⋯⋯. 손 씻는 세면대에도 푸른 꽃병에 보라색 꽃이 담겨 있었습니다. 미처 눈길이 닿지 못할 수 있는 자리마다 놓인 모양도 빛깔도 다채로운 꽃병들의 모습은 참 반가웠습니다. 그 모든 것이 구석구석까지 세심하게 손길이 닿은 흔적들이었습니다. 공간을 돌아다니며 이곳에까지 마음을 쏟았구나, 하고 마음속 깊이 느꼈습니다.



꽃병이 놓인 풍경이란 새삼 사람의 기분을 온화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곳곳에 놓인 작은 꽃병들을 만날 때마다 사람의 마음은 누그러지고 온순해집니다. 쌀쌀한 날씨와 이국에서의 일상 속에서 저도 모르는 사이 짐짓 뾰족하게 얼어 있던 모양인지, 가와이 간지로의 저택 곳곳을 누비는 사이에 점점 마음 한켠이 포근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화분이 아닌 꽃병이 있는 풍경은 왜 조금 더 온화하게 다가오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뼘 정도 되는 꽃병은 아주 작은 자리에도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책상의 귀퉁이에도, 세면대 모서리에도, 부엌의 싱크대에도 말입니다. 꽃병이 없었다면 눈길을 주지 않고 무심하게 지나쳤을 곳에 마음을 하나 올려 둡니다. 꽃은 나무보다 쉬이 잎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꽃병의 물은 자주 갈아줘야 하며, 주기적으로 새로운 꽃을 꽂아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부지런한 마음과 손길을 느낄 수 있는 덕에, 누군가의 성실과 사랑을 느끼고만 사람은 그만 마음을 허물어뜨리게 되는 것이겠지요.


꼭 다른 공간이 아니라 나의 집에서도 온화한 기분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앙증맞은 꽃이 고개를 내밀고 반겨준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요? 집으로 돌아가면 온기를 잃은 곳곳에, 나의 무심이 놓이던 곳곳에 한 송이 꽃들을 놓아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화장실에 하나, 책상에 하나. 꽃병을 놓아둘 때마다 기억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내가 방금 놓은 것은 마음이라는 것을요.



둘러 보고 나오는 길에 고양이의 부드러운 등을 한 번 쓰다듬고, 거리를 걸으며 잠시 떠올렸습니다. 꽃병이 놓인 그 책상에 앉아, 그는 과연 창밖으로 어떤 풍경을 내다보았을지 하고요. 창틀의 모서리에 놓여 있던 노란 꽃이 한동안 아른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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