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통해 보는 공리주의의 한계
코로나19로 인한 길고 길었던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고, 점차 일상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OTT 서비스를 중심으로 이뤄지던 영화 산업도 다시금 극장으로 눈을 돌리고, 할리우드의 대형 프랜차이즈인 마블도 인기 히어로인 스파이더맨과 닥터 스트레인지의 단독 영화의 후속 작품을 연달아 선보이며, 극장가도 다시금 활기를 띠고 있죠.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이 오리지널 팬들과 새로 유입된 팬들의 대 통합을 이뤄낸 직후에 개봉한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인피니티 사가 이후 등장한 멀티버스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것도 토비 맥과이어의 스파이더맨 트릴로지의 샘 레이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기에 팬들로 하여금 이미 개봉 전부터 많은 관심과 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했죠. 하지만 막상 개봉한 닥터 스트레인지 2편은 스파이더맨을 기대한 팬들에게 이블데드를 선보이며, 부제와 같이 관객들에게 대혼돈을 선사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호불호가 갈릴만한 연출과 이야기 전개 방식이라는데 동의하긴 합니다만, 몇몇 아쉬움을 제외하면, 연출과 스토리 모두 만족했던 작품입니다. 특히 멀티버스라는 설정은 차치하고서라도, 작품의 내러티브에 녹아있는 주제가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버린 히어로라는 집단의 목적과 정의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기에 현재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참으로 시의 적절한 작품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닥터 스티븐 스트레인지의 정의관은 공리주의에 기초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양적 공리주의이던, 높은 수준의 공리에 가치를 두는 질적 공리주의이던 기본적으로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죠. 스트레인지는 첫 솔로 영화에서부터 어벤저스, 스파이더맨에 이르기까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항상 큰 공리를 위해 작은 것들을 희생시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도르마무를 돌려보내기 위해 자연의 섭리인 시간을 거스르는 금기를 행했고, 타노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블립 된 사람들의 5년이라는 시간과 블랙 위도우(나타샤 로마노프), 아이언맨(토니 스타크)을 희생시켰습니다. 또한 자신과 피터의 실수를 만회하고 멀티버스의 문을 닫기 위해 본인의 선택이긴 했지만, 피터 파커의 인생을 희생시키기도 했죠. 이처럼 대를 위해서는 슬프더라도 이성적으로 소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닥터 스트레인지의 정의관인 것입니다.
물론 공리주의에 기초한 문제 해결 방식은 비단 그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유명한 타노스도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정의를 구현하고자 했죠. 인구의 절반을 사라지게 해 나머지 절반을 살리겠다는 타노스의 극단적인 정의관과 스트레인지의 정의관은 그 규모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공리주의에 뿌리를 둡니다. 보다 큰 행복을 위해 자신이 생각하는 보다 작은 불행을 희생시키는 것이죠. 결국 스트레인지는 타노스와의 전투에서 타노스와 같은 방법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두 시간여의 러닝타임 동안 과연 이러한 공리주의적 해결 방식이 옳은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차베즈와 스트레인지의 멀티버스를 누비는 여정 속에서 말이죠. 그들은 소를 희생시키려다 실패한 여러 차원의 스트레인지를 만납니다.
작품의 초반부 등장했던 디펜더 스트레인지는 완다를 막기 위해 차베즈를 희생시키려다 자신이 사망하는 결과를 낳았고, 중반부의 슈프림 스트레인지는 자신의 세계를 지키려다 인커젼을 일으켜 다른 차원을 멸망시켰으며, 본인도 처형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시니스터 스트레인지는 자신에게 가장 큰 행복인 팔머와의 관계를 위해 여러 차원의 자신들을 희생시키고, 결국에는 자신의 차원마저 사라지게 만들었죠.
스트레인지는 멀티버스 속 실패한 자신의 모습들을 보며 성장하고, 배워갑니다. 누군가를 희생시키면서 싸우는 방식이 아닌 타인을 믿고, 힘을 더해 함께 싸우는 방식을 말이죠. 그렇게 차베즈를 믿고 맡김으로 인해 완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마치 작은 음표 하나가 더해져서 시니스터 스트레인지와의 전투에서 승리했듯 말이죠.
어떠신가요?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공리주의의 방식은 계속 무언가를 희생시키고 그 희생을 정당화하는 딜레마를 낳습니다. 또한 절대적으로 경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좁은 세계관과 시야는 공리가 증가하는 방향을 정확히 알 수 없기에 오판을 내리기도 합니다. 마치 빨간 불에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던 스트레인지나 잘못된 판단으로 모두 사망해버린 일루미나티처럼 말이죠.
또한 누군가를 희생시켜 정의를 지키는 방식은 팔머의 결혼식장에서 만난 닥터 웨스트의 ‘다른 방법은 없었냐?’는 질문이나, 스칼렛 위치가 된 완다의 ‘너희가 하면 정의고, 내가 하면 악이냐’는 발언처럼 희생된 사람들에게는 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타노스와 스트레인지의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는 보다 넓은 세상의 다양한 것에 시선을 두고, 많은 것을 배워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판단이 항상 옳다고 생각했던 스트레인지의 좁은 시야가 드넓은 멀티버스를 경험한 후에 확장되고, 성장했듯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