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 정언명령 그리고 타노스
올해 5월 블랙 위도우를 시작으로 그동안 연기되었던 마블 영화들이 한 두 달에 한 번 꼴로 개봉하고, 최근엔 디즈니 플러스까지 공식 론칭이 되면서 마블 팬들에겐 행복한 날들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최근에 개봉했던 이터널스에서는 본격적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세계관이 확장되며, 기존의 서사에 숨겨져 있던 이야기들의 숨겨진 내용까지 풀어냈지요. 셀레스티얼과 관련된 설정이 밝혀지며, 페이즈 쓰리까지의 최강 빌런이었던 타노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하였죠.
이터널스에서는 우주의 초월적인 존재인 셀레스티얼과 그들이 창조해냈지만 설계를 벗어난 생명체, 데비안츠. 이들을 막고 행성들을 지키기 위해 창조된 이터널스들 간의 싸움을 다루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론 말이죠. 작품 속 이야기가 진행되며 밝혀진 사실은 행성이란 셀레스티얼의 씨앗이 담긴 자궁과 같은 존재였고, 행성에 사는 지적 생명체가 일정 수준의 수에 도달하면, 행성이 파괴되며 셀레스티얼이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적 생명체들이 충분히 많아질 때까지 포식자들로부터 그들을 지킬 존재로 데비안츠가 창조되었고, 이들이 통제를 벗어나 새로운 포식자가 되자 이를 막기 위해 이터널스가 탄생하게 된 것이죠.
마블 세계관 속 지구 또한 이러한 셀레스티얼 ‘티아무트’가 심긴 행성입니다. 지구의 인간들이 티아무트를 깨우기 위한 지적 생명체였으며, 이들을 지키기 위해 파견된 것이 작품 속 이터널스들이죠. 그렇게 지구의 중심부에서 성장하던 티아무트는 어벤저스가 타노스와 싸워 승리하고, 블립 되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돌아오면서 탄생에 필요한 조건이 갖춰지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타노스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죠.
사실 '인피니티 워'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타노스는 그 당시에도 빌런으로만 치부하기에는 납득할만한 신념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인구가 증가하고, 분배의 문제가 생기며, 결국에는 분배할 자원마저 소멸되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생명체의 절반을 없앤다는 다소 과격한 신념이긴 했지만, 실제로 본인이 그러한 일들을 겪었기에 납득할 수 있는 부분 또한 보여주는 입체적인 빌런이었죠. 하지만 이터널스의 이야기들은 사실 타노스가 셀레스티얼들의 목적을 알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고향인 타이탄 행성 또한 같은 일을 겪었기에 그렇게 필사적으로 생명체의 반을 없애 셀레스티얼들의 탄생을 막으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그의 신념이 보다 더 설득력을 얻게 된 것이죠. 타노스라는 인물의 행동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더 이해하게 된 타노스의 핑거 스냅을 과연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해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깊이 생각해보기 위해 정치 철학의 두 관점을 통해 이 문제를 보았습니다. 바로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와 칸트의 정언명령을 통해 말이죠.
먼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이야기하는 공리주의는 어떨까요? 핑거 스냅만 놓고 본다면 두 공리주의 견해가 살짝 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는 사라진 생명체 절반의 불행이 살아남은 생명과 앞으로 태어날 생명들의 행복보다 양적으로 적다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스냅 직후에는 생존한 사람들도 행복보다는 불행을 느꼈겠지만, 엔드게임 이후의 모습을 그린 '팔콘 앤 윈터 솔저' 속 블립 당시의 세상을 추구하는 '플래그 스매셔'를 공감하고 지지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나 새로운 생명들이 계속 태어나는 등 행복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게 되면, 타노스의 핑거 스냅은 정의로운 행동이 될 수 있는 것이죠.
두 번째로 행복의 질적인 면을 측정해야 한다는 밀의 질적 공리주의를 통해 본다면 조금 더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살아남은 생명과 태어날 생명들의 행복의 양이 많다고 할지라도, 사라져 버린 생명들의 불행이 이보다 질적으로 크다면,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이터널스의 이야기까지 생각해 본다면, 티아무트를 비롯한 여러 행성의 셀레스티얼들이 탄생하고 행성이 파괴된다면, 행성 전체의 불행이 행복을 질적으로도 뛰어넘을 것입니다. 결국 밀의 질적 공리주의를 통해 본다고 할지라도, 타노스가 정의로운 행동을 한 것 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죠.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임마누엘 칸트의 ‘정언명령’을 통해 본다면 어떨까요?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이나 그 안에 기록된 정언명령은 내용이 복잡하고, 어려운 부분이 많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정리하자면, 칸트에게 있어서 정의는 동물과 달리 이성과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목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쾌락이라는 본성을 정의로 생각하는 공리주의에 대해 회의적이죠. 이러한 정의는 온전한 자유의지로, 목적과 수단 모두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선의의 거짓말 같이 아무리 목적이 도덕적이어도 수단이 도덕적이지 못하다면, 그것은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이며, 정의롭지 못한 것이죠. 이를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부여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법칙, 정언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정언명령이란 어떠한 조건 없이 부여되는 명령으로, 먼저는 보편적인 정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행동을 했을 때도 결과가 정의롭다면, 그것은 정의인 것이죠. 두 번째로는 인간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수단으로써 인간을 이용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자, 다시 타노스로 돌아와서 이를 적용해 본다면 어떨까요? 먼저 타노스의 모든 계획은 온전한 자유의지로 행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온갖 고난을 겪어가면서도 이를 위해 노력하죠. 또한,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모든 계획을 이행해갑니다.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딸에 대한 감정까지 억누르면 말이죠. 그리고 어떤 존재가 이를 행했어도 같은 결과를 낳습니다. 셀레스티얼의 부활을 늦춰 행성의 멸망을 막고, 환경과 생명의 균형을 맞추게 되죠. 그러나 한 가지, 생명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사라지는 생명들 속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사라지는 생명들은 살아남은 생명들의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써 사라지게 만든 것이죠. 이를 이루는 과정에 있어서도 가모라를 소울 스톤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죽게 만들고, 로키나 아스가르드의 주민들을 비롯한 수많은 생명을 수단으로써 죽입니다. 그렇기에 칸트를 통해 본다면 타노스는 정의의 히어로가 아닌, 빌런인 것입니다. 목적은 정의로웠을지라도 그 수단은 정의롭지 못하기에 정의가 될 수 없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