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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출발

취업

by 글굽는 제빵사

꿀맛 같은 휴일었다. 오랜만에 폭신한 침구들 사이를 유영하며 늦잠을 잤다. 늦잠이 이렇게 달콤한 맛이었던가. 새삼 놀랐다. 언제든 원하는 시간에 잠들고 깨어있을 무한한 자유가 허락되었던 때는 느끼지 못했던 달콤함이다. 너무 쉽게 얻는 건 소중함도 쉽게 잃어버리나 보다.

25년 11월 5일을 기점으로 나의 신상에는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경단녀 딱지를 떼고 첫 출근을 하게 된 것이다. 드디어 3년간의 안식년을 마치고 다시 사회의 일원이 됐다. 일터는 집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 출근시간도 8시. 그러므로 제시간에 도착하려면 새벽 5시 반이면 눈을 떠야 한다. 알람 소리에 깨어 창밖을 보면 세상은 아직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비몽사몽이며 눈을 비비며 화장실로 향한다. 허둥지둥 나갈 채비를 마치고, 현관문을 나서면 얼음처럼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온다. 혀끝에서 페퍼민트 맛이 느껴지는 유난히 상쾌하고 달달한 새벽 공기가.

버스를 타고 일터로 향하다 보면 차창 너머로 서서히 동이 터 오르는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황금빛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면 마음이 울렁거린다. 일출을 보면서 출근하는 나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진다. 자존감도 함께 자란다. 대단한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취업난 시대에 나의 자리가 생겼다는 것이 내심 뿌듯하다.

사실, 취직의 문을 다시 두드리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취업난도 우려스러웠지만, 3년이나 세상과 멀어져 있었던 만큼 다시 경계를 넘어 새 출발을 한다는 것이 설레면서도 두렵기도 했었다. '세상이 다시 날 환영할까' 하는 우려도 컸다.
떠날 때와는 달리 나이의 앞자리 숫자도 바뀌어 있었고. 그럼에도 7년간 한 분야에서 성실하게 쌓아 올린 경력이 있었기에 기대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부딪힌 현실은 생각보다 싸늘했다. 병원에 수십 장의 이력서를 넣었지만 어디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마도 나이의 벽이 컷의 라라 추측한다. 하지만 남편과 약속한 것이 있었다. 우리는 함께 하고 싶은 일들도 있었다. 우리만의 인생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취업이 선행되어야 했다.

나는 계획을 바꿨다. 한 분야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 이력서를 넣어보기로 했다. 알바몬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이력서를 여러 번 수정하며 여러 직종에 지원을 했다. 그리고 그중 한 곳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었다. 마트 조리제안의 초밥을 만드는 업무였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하며 스시 전문점에서 짧은 기간 일을 해본 경험이 있었지만, 요리 관련 업종은 생소한 분야였다. 그런 만큼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우려가 컸다. 하지만 기우였다. 그 두려움은 첫날에 눈도 크듯 사라졌다. 처음만난 나를 너무도 따뜻하게 대해주는 동료들 덕분이었을까. 나는 예상과 달리 빠르게, 자연스럽게 그곳에 스며들었다.

평소에 요리에 관심이 많았던 것도 도움이 됐다. 스시는 내가 특히 좋아하는 음식이었기 때문에 배우는 과정이 너무 즐거웠다. 나중에 잘 배워서 소중한 지인들에게 직접 만든 스시를 대접하고 싶다는 야무진 계획도 세웠다.

일터에 나가지 않는날이 섭섭할 만큼 현재는 너무 즐겁고 행복하게 일하고 있다. 직장생활은 언제나 지겹고 힘든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팀웍이 훌륭하고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들고 일을 하며 세상엔 즐거운 일터도 존재한다는 것을 새롭게 배워간다.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직업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건 그 일을 함께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3개월 계약직이라 이들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겠지만 함께하는 동안 나에게 찾아온 '뜻밖의 행복'을 후회없이 누리고 싶다.

이곳에서 일을 하며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마트 조리제안 업무. 남들이 알아주는 일도, 대단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사회적으로 보기 좋은 일을 할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을 느낀다. 아마도 과거의 나였다면 좀 더 사회적으로 명예로운 직업을 찾기위해 고군분투 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많은걸 겪어낸 지금, 이제는 남이 보기에 멋진 일이 아닌 나에게 행복을 줄 수있는 일을 하고싶다. 아직은 내가 어디에 정착할 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이곳에서 착실하게 경험을 쌓아가려한다.

올해는 꼭 새옷을 입고 한해를 마무리 짓고 싶었는데 다행히 잘 해결된 것 같다. 다가올 내년도 인생의 지도에 열심히 점을 찍어가며 활기찬 한해를 만들어 가고 싶다. 그 시작으로 1월1일 새해 일출런을 신청해두었다.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맞으며 탕하는 총소리와 함께 힘차게 달려나갈 그날이 벌써부터 기다려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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