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암, 명의(名醫), 한가한 의사
제 환자 중에는 2달 넘게 입원 치료받고 계시는 할머니 환자가 있습니다. 90이 넘으신 연세에 대장암이 터져서 응급수술을 했고, 여러 위험한 고비가 많았지만 꿋꿋하게 잘 이겨내셨습니다.
사실..
대장암이 터진다는 것은 마치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입니다. 암이라는 것을 진단받은 것 자체도 억장이 무너지는 일인데, 게다가 그 암이 터져서 수술까지 해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마저 무너져 내리는 상황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장암을 수술했을 때의 예후는 어떨까요??
국내의 대학병원 자료에 따른 대장암의 TNM 병기의 5년 생존율을 보면..
병기 I : 97%
병기 II : 88%
병기 III : 65%
병기 IV : 13%
Reference : 외과학
즉, 암1기로 진단되었을 때 5년 동안 생존할 확률이 97%, 암2기는 88%, 암3기는 65%, 암4기는 13%라는 것입니다. 암4기라고 하면 흔히들 말기암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렇게 4기가 되면 생존율은 급격히 낮아지게 됩니다.
물론 위에서 보여드린 생존율은 외과학이라는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기 때문에 최근 연구되고 있는 데이터를 보면 생존율은 아마도 더 좋아졌을 거라 생각됩니다.
보통 암4기라고 하면 처음 생겼던 암이 그 자리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암이 전이된 경우를 말합니다. 대장암은 간이나 폐로 전이가 잘 되기 때문에 대장암 환자가 이런 장기에 암이 생겼다면 전이되었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죠. 또한 이 할머니 환자처럼 대장암이 배안에서 터졌을 경우에는 수술로 눈에 보이는 암을 모두 제거하였다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암의 씨앗들이 배 전체에 퍼져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런 경우도 암4기와 마찬가지로 치료를 하게 됩니다.
암4기 환자들은 수술을 받은 후 결국 항암치료를 해야 하지만 이환자처럼 나이가 많거나 몸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경우 항암치료를 늦추거나 하지 않는 경우가 생깁니다.
암4기의 5년 생존율이 13%라는 것은 87%는 5년까지 생존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1년이 될 수도 있고, 6개월이 될 수도 있고 그보다 더 짧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13%에 해당된다면 5년 이상 살 수 있다는 말이 될 수 있는데 실제로 환자가 87% vs 13% 중 어디에 속할지는 아마 '신(God)'만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환자도 조직검사 결과 대장암이 진단되고 또 그 암이 배안에서 터져있었던 상태라 나이를 고려하여 항암치료는 안 하신다고 결정하였습니다. 너무 원칙적으로 접근했다가는 독한 항암약 때문에 환자는 더 힘든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보호자 또한 이를 안타깝게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남은 시간 편안히 지내실 수 있도록 그런 결정을 하신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는 연세도 많으시고 대장암 수술이라는 큰 수술 때문인지 회복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수술 후에는 걸어 다니면서 운동도 많이 해야 회복도 빠르고 전신 몸상태로 좋아지는데 침대에 누워계시다 보니 여러 위험한 고비들이 많았습니다.
폐 주변에 물이 차서 호흡곤란도 생기고,
열도 나는 순간도 있었고,
걸어다니지 못하니 장운동이 떨어져서 몇일씩 대변을 못 보는 일도 있었습니다.
수술 후 처음으로 식이를 진행하려고 할 때는 떨어진 체력 때문에 미음조차 삼키는 것이 힘들어 오랜 기간 영양제 수액치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제 마음을 졸이게 하는 경우도 있었고 PICC(peripherally inserted central cather, 말초삽입형중심정맥카테터)라는 팔에 넣어놓은 주사바늘에 염증이 생겨 열이 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생기면..
저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머리를 부여잡고..
"아.. 할머니 좋아질 수 있을까??
퇴원하실 수 있을까??
회복 못하시는 거 아냐??"
이런 생각에 우울해할 때도 있고 잠을 설칠 때도 있었습니다.
최근 분당서울대병원 대장암센터 외과교수님이신 '오흥권 교수님'이 쓰신 "타임아웃"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을 보면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진짜 명의는 널리 이름난 의사가 아니라,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을 가진 '한가한' 의사이다. 내가 여유가 있어야 남을 잘 돌볼 수 있다. 명의라고 불리는 바쁜 의사는 밀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쓸 시간이 늘 빠듯하다. 하루에 환자 8명을 수술하는 의사와 환자 2명을 수술하는 의사 중 어떤 의사가 수술대에 누워 있는 환자에게 정성을 더 쏟겠는가? 하루에 환자 150명의 외래 진료를 하는 의사와 30명의 진료를 하는 의사 중 어떤 의사가 환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겠는가? 명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루에 8명씩 수술을 하지도 않고 하루에 150명의 외래진료를 보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회복 속도가 더디거나 중간중간 알 수 없는 문제가 터지는 날이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지 못한 일이 생겼을 때 해결의 실마리는 결국 '관심' 이라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입원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환자 상태를 다시 체크해보고 수술할 때의 특이 사항이나 환자의 과거 질병까지 혹시나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해보는 것입니다. 제가 한가하지는 않지만 제 환자한테는 관심이 아주 아주 많거든요..
예전 서울아산병원에서 근무할 때를 돌이켜보면 '타임아웃'이라는 책에서 나오는 '명의(名醫)'처럼 하루에 수술 8개를 하거나 하루 150명의 외래환자를 보는 것이 거뜬한 EBS 명의에서 나오시는 그런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 유명하신 교수님들 밑에서 배우고 수술하고 일할 때면 정말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갈 때가 많았습니다. 머릿속으로는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오로지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시간과 체력은 안타깝게도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 오직 한 곬으로, 다른 것은 있을 수 없고 오직, 오직 한곳에 집중되어 있음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말
지금은 EBS '명의(名醫)'의 교수님들처럼 몇 달씩 수술이 예약되어 있거나 외래 환자가 100명이 넘어 정신없이 진료를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행이죠..
저는 타임아웃이라는 책에 나오는 '한가한' 의사라는 말이 참 마음에 와닿습니다.
어찌 보면 정말 환자가 없어서 한가하고 실력 없어서 환자가 없는?? 그런 의미로 느껴질 수도 있을 테지만..
오히려 한가해서..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바쁘지 않아서..
내가 수술한 환자, 내가 수술할 환자, 치료하는 환자에게 '오로지'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오흥권 교수님도 '한가한 의사'를 '명의(名醫)'라고 쓰지 않으셨나 합니다.
2달가량 입원치료를 받으셨던 할머니는 이제 퇴원 준비를 합니다.
그동안 열이 나는 원인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했던 날도 있었고, 식사양이 부족하고 잘 못 드셔서 영양치료를 해야만 했던 날들도 있었고 팔다리부터 소변보는 것까지 다양한 문제가 있어 여러 과장님들과 상의했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들이 사 오는 죽으로 매끼 식사도 잘하시고 컨디션도 좋아서 집에 가실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계십니다.
매번 회진을 가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집에 가서 아들 봐야 해.
아들 보고 싶어."
"할머니 이제 곧 가실 수 있어요.
보고 싶다던 아들. 만나러 갈 수 있어요."
요즘 같은 시대는 바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의사들도 3분 진료, 5분 진료할 정도로 정신없이 진료 보기도 하고 환자들은 모니터 앞에 있는 담당의사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환자들에게 진료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담당의사의 눈을 마주치면서 시작합니다. 즉 진료실이라는 공간에서 서로 인사를 하고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아픈 부위를 만져보고 관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쩌면 환자들은 나에게 '오로지 집중'할 수 있는 그런 '한가한 의사'를 바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