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시간이 허락할 때 국내여행을 한다. 산 보다 바다를 좋아하기 때문에 주로 바다가 있는 지역으로 여행 다닌다. 특히 남해! 동해, 서해, 남해 중에 나는 남해가 가장 좋다. 이유는 딱히 없다. 멀면 멀수록 여행하는 느낌이 나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여수, 통영, 거제, 부산 등 한국 지도를 봤을 때 남쪽에 있는 지역을 애정 하는 편이다. 집에 스크래치 한국 지도가 있다. 여행을 갈 때마다 하나씩 지우는 재미가 꽤 커서 가끔 그 지도를 보며 다음 행선지를 정하곤 한다. 그날도 그랬다. 시간이 생겨 한국 지도를 보다가 이번에도 남해 부근의 한 지역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부터 가보고 싶기도 했다. 그곳을 검색하다가 그 지역을 통해 갈 수 있는 섬까지 검색하게 되었고, 사진 속 풍경에 반한 나머지 그곳에 꼭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여자 혼자 섬에 가면 안 된다는, 예전부터 들어온 주변의 말이었다. 여수나 거제도에 갔을 때 혼자서 섬을 갔지만 항상 당일 여행으로 갔기 때문에 부담이 덜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서 당일로 보고 돌아오기엔 시간이 턱없이 모자랄 것 같았다. 충분히 그 섬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에 숙소를 정하고 일사천리로 예약까지 해버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금 시대에 무슨 그런 말이 다 있나. 옛날 말이라고 치부했다. 옛날이나 그렇지 요즘 같은 시대에 여자 혼자 섬에 가면 안 된다니 이 얼마나 고리타분한 생각인가. 그렇게 섬으로 향했다.
배를 타고 들어가서 가장 먼저 예약한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짐을 풀고 주변 관광지로 향했다. 여행만 가면 힘이 넘치는 나는 산에 위치한 그곳까지 걸어서 가기로 결정했다. 지도 보고 방향만 대충 확인한 다음에 무작정 걸었다. 실제로 와본 이곳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도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와 섬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성이 한없이 걸어도 지치지 않게 해 주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도 왜 이리 아름다운지. 나름 유명한 곳이지만 비수기라 여행객도 없었다. 오로지 나 혼자라 더욱 자유롭게 느껴졌다. 어느덧 반 정도 갔을 때 나를 지나치던 경찰차가 앞에서 멈췄다. 내려간 창문 틈으로 경찰관님이 어디 가냐고 물으셔서 관광지 이름을 말하며 그곳에 간다고 했다. 혼자 그렇게 올라가면 위험하다고 하시며 뒷좌석에 태워주셨다. 서서히 힘들다는 생각이 들고 있던 터라 운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생애 처음 타본 경찰차는 무척이나 신기했다. 아주 당연하겠지만 뒷자리에서는 문을 못 연다. 문득 내가 앉은 자리는 무수한 범죄자들이 앉았던 자리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경찰차 내부는 색으로 비유하면 회색이었다. 황량한 느낌. 승용차와는 다른 느낌에 나도 모르게 “우와,, 신기하다.. 처음 타봐요 경찰차..” 와 같은 바보 같은 소리를 해댔다. 그 바보 같은 소리에 경찰관님이 “웬만하면 타지 마세요, 앞으로도요” 라고 한마디 하셨고, 그 한마디가 주는 묵직함에 입을 닫고 조용히 갔다.
그렇게 관광지를 구경하고 나서 숙소로 돌아갔다. 내가 묵었던 숙소의 사장님은 친절하셨다. 원래 예약자가 나뿐이었으나 당일에 예약한 여행객 한 명이 있어서 밤에 사장님과 당일 예약한 여행객, 나 이렇게 숙소 앞 평상에서 셋이 티타임을 가지게 되었다. 행복했다. 숙소 앞에 바다가 있어 바람을 타고 오는 바다내음이 좋았고 하늘에 떠 있는 별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앉아있었다. 사장님이 말이 많으셔서 본인의 지난날에 대한 허세 섞인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이야기하셨다. 그래도 괜찮았다. 내 귀는 바다를 향해있어서 사장님의 이야기는 우렁차고 청량한 파도 소리에 밀렸다가 다시 들어오고, 밀렸다가 다시 들어왔다.
당일 예약한 여행객은 다음날 오후 배를 타고 떠났고 이제 숙소 예약자는 나뿐이었다. 전날 사장님이 내가 이동할 때 두 번 정도 차를 태워주셨어서 고마움에 저녁에 항구 근처에서 회를 사들고 숙소로 가서 사장님과 함께 나눠먹었다. 가벼운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는데 사장님이 갑자기 대뜸 셀카를 같이 찍자고 했다. "왜요?"라고 물으니 본인이 소속되어있는 모임에 가서 자기 세컨이라고 말하고 다니고 싶다고 했다. 미친놈인가 싶었다. 그리고 연이어 점차 수위를 올려가며 차마 글로 쓰지 못할 정도의 성적인 이야기들을 퍼부어 댔다. 전날 젠틀했던 사장님의 모습이 아니었다.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은 추잡하게 늙어가고 있는 한 중년 남성이었다. 그의 입에서 쏟아지는 추잡한 말들은 무척이나 역겨웠다. 숙소를 운영하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행동까지 했던 경험을 나에게 이야기했다.
내 성격상 나도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사람은 아니라서 지금 뭐 하는 거냐고 그 더러운 입 닫으라고 화내고, 소리치고, 항의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갇힌 섬에서 그런 얘기를 듣고 있자니 본능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한 명도 지나가지 않았고 이미 밤이라 주변은 너무 어두웠다. 그 흔한 가로등조차 잘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근처에 있는 다른 숙소는 불이 전부 꺼져있어서 방을 옮길 수도 없었다. 처음으로 무서움을 느꼈다. 공포영화를 볼 때 드는 무서움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무서움이었다. 어떻게든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다. 그래 봤자 숙소였고, 숙소도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가로등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한 여자와 그보다 더 센 힘을 가진 남자 단 둘만 있다고 상상해보라. 가히 '여성'으로서 처음 느껴보는 두려움이었다. 듣기 싫은 이야기들에 화를 내지 못했다. 내가 화를 내면.. 그다음은?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이야기를 멈추고 수긍하며 돌아갈지, 더 화를 내며 다른 일이 생길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스스로가 생물학적으로 나약한 존재임을 새삼 깨달았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화가 났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화제 전환뿐이었다.
역겨운 이야기를 쏟아내는 사장에게 계속 화젯거리를 내던지며 다른 대화를 유도했다. 하지만 그건 정말이지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어떻게든 자꾸 그이야기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나는 벌떡 일어나 이제 그만 들어가 봐야겠다고 말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가 예약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공기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모든 문과 창문을 전부 걸어 잠갔다. 하지만 문을 잠근다한들 마스터키가 존재한다면 사장이 들어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말 그대로 ‘모르는 일’ 이지만 그 모르는 일이 나를 자꾸만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의 의도가 어찌 됐던 정말 무서웠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언제든 걸어 잠긴 문이 열릴 것만 같았다. 그 사장이 실제로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해도 그는 이미 나에게 나쁜 사람이었다. 두려움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스마트폰 알림이 울렸다. 사장이 나에게 잘 자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소름이 돋았다. 예약 정보를 이런 식으로 이용하다니. 저 사람이 내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정말이지 너무 싫었다. 그렇게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첫 배가 뜨는 시간보다 더 이른 시간에 모든 짐을 챙겨 그곳을 빠져나왔다. 항구까지는 거리가 있어서 새벽녘 어둠 속을 헤집고 그렇게 무작정 걸었다. 인프라가 잘 갖춰진 도시에서 살았으니 한 번도 어둠 속을 걸어본 적이 없었다. 걷고 있는 그 길조차 두려웠다. 새벽시간이라 고요했지만 차 소리만 나면 깜짝 놀라 주변을 살폈다. 스마트폰 조명에 의지해서 걸어 나갔다. 적막감이 날 휘감았다.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없애줄 노래를 스마트폰 스피커로 틀어놓고 반은 뛰는 듯한 걸음으로 쉴 새 없이 걸었다. 떨리는 마음을 붙잡고 걷고, 또 걷다 보니 어느새 저 멀리 항구가 보였다. 서서히 사람들이 많아졌고 배를 타고나서야 맘이 놓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다른 지역을 더 돌아보고 갔어야 했지만 이미 무너진 멘탈은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배를 타며 마음이 아주 조금 놓였다. 하지만 내가 여자라서 겪은 이 모든 상황,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스스로에 대한 나약함에 너무나 분노했다. 분노는 다시 숙소 사장을 향했다. 항의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함에 너무 화가 났다. 그 자리에서 당장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쫓기듯 가는 것이 너무나 억울했다. 내가 겪은 상황에 대해 되짚어보다가 처음 예약했을 당시, 예약받은 사람은 사장이 아닌 다른 가족이었다는 것이 문득 생각이 났다. 당장 예약한 어플을 켜서 그 사람한테 메시지를 보냈다. 당신 가족이 한 행동으로 인해 나는 내 여행을 망쳤고 도망치듯 새벽에 뛰쳐나와 집에 가는 중이라고, 그리고 나 같은 여행객이 다시는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입력한 긴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사실 무슨 정신으로 썼는지도 모르겠다.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생각보다 빨리 답장이 왔다. 너무 창피해서 무슨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사과를 했다. 그럼에도 내 화는 풀리진 않았지만 처음보다는 진정이 됐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가족이 한 명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탈하게 집으로 잘 돌아왔지만 여자 혼자 섬에 가면 위험하다는 그 말을 제대로 몸소 경험했다. 집으로 돌아온 직후 작은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며칠 동안 주변에 중년 남성이 지나가면 다 이상하게 보였다. 그분들은 아무 잘못도 없는 선량한 시민 분들이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 예민해졌다. 증상은 곧 사라졌다.
해외여행 갈 때 외교부 사이트를 방문하면 단계별 여행 경보로 나라가 분류되어 있다. 그곳에 포함된 국가는 돈을 준다 해도 절대 방문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매우 안전한 나라 중 하나로 세계적으로 손꼽힌다. 보통 다른 나라는 나라 안에서도 위험지역이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위험지역이 특별히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 내가 가지 않아야 할 곳을 갔다던가, 위험한 곳을 갔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온 직후 한동안 다시는 섬에 가지 않겠다고 말을 하고 다녔다. 하지만 지금 누군가 다시 묻는다면 내 대답은 '간다'이다.
어쩌면 오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불쾌한 경험 하나로 인하여 한국의 아름다운 섬을 보는 기회를 놓쳐버리고 싶진 않다. 유치하고 어리석지만 섬을 의도적으로 여행지에서 제외하면 숙소 사장한테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없어져야 할 것은 돼먹지 못한 인성과 무개념 사장들이 운영하는 숙소이지 선량한 여행객이 아니니까. 이러한 불쾌한 일을 겪은 것에 내 잘못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게 내가 다시 섬 여행을 하겠다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숙소에 대한 사전조사는 앞으로 철저히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