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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록 Jul 18. 2021

어른들만 이해하는 거짓말


외할아버지는 나의 자전거 선생님이었다. 유치원 때는 자전거 뒷칸에 어린이 안장을 매달아 나를 업다시피 해 달렸고, 내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땐 안장을 떼고 그 위에 올라서게 했다. 엄마가 그 광경을 봤다면 둘에게 자전거 금지령이 내려질 게 뻔한데도, 그의 단단한 어깨를 붙잡아 종알종알 잘도 떠들어댔다. 휘경동 어느 골목서부터 한강이 보일 때까지, 그는 허허 웃으며 내 종알거림과 상관없는 조언들을 늘여놓았다. "남자애들이 까불면 신발 주머니로 옆통수를 갈겨" 라든가, "아무리 잠이 와도 일기는 매일매일 쓰는 게 좋아" 라든가. 나는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고, 그는 나의 반응에 개의치 않아했다. 



그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쓰러졌다. 뇌졸중인지 뇌경색인지, 하여튼 나쁜 것들이 할아버지의 핏줄을 막아버렸다고 했다. 엄마와 아빠가 그의 병원으로 출동한 그 날, 나는 밤새 집을 지키며 그에게 편지를 썼다. 어서 일어나 나와 자전거를 타자고. 꽝꽝 언 물이 그렇게 달다며, 할아버지는 그런 거 모르지, 그런 말을 썼다.



투병생활이 길어지며 일평생 그를 품었던 집을 낯선 이에게 팔아야 했고, 중환자실은 일반실로, 그러다 요양 병원으로 바뀌었다. 그를 사랑한ㅡ지금에서야 깨달았지만ㅡ간병인이 모종의 이유로 그를 떠난 후로,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전엔 함께 잠을 잘 때, 너무 꽉 붙드는 바람에 온갖 찡얼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그가 나를 보면 눈가를 붉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는 게 불편했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 믿었던 이가 그렇게 스러진다는 걸 확인받고 싶지 않아 불편했다. 슈퍼맨은 영원히 슈퍼맨이니까. 



어느 주말, 요양병원에 들러 나는 어김없이 그의 손만 붙잡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그가 눈시울을 붉힐까 봐 애써 딴청을 피우면서. 그의 피부를 수건으로 닦아내던 엄마가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아빠, 뭐라고? 입모양으로만 말할 수 있었기에, 그는 같은 말을 수십 번 반복해야 했다. 집 문서가 있다고요? 아이고, 빨리 줘요. 그는 자신의 집 옷장 바닥에 열 개가 넘는 집문서가 있다고 했다. 엄마는 그 얘기를 듣고 그냥 웃기만 했다. 나는 고개를 쳐들고 기웃거리다 눈만 끔뻑였다. 그는 자신의 집이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간 사실도 모를 터였다.



나는 꽤 오랫동안 그의 말을 믿었다. 할아버지, 숨겨둔 건물 내놔요! 하던 때도 있었다. 적어도 그가 생기가 돌 때였지만, 그는 웃었다. 이전처럼 허허, 하는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덧니를 빼꼼 내보이며 웃었다. 나는 진심이었다. 그래야 할아버지 집도 찾아올 수 있지 않은가. 엄마와 아빠가 그의 병원비를 직시하며 비치던 일말의 절망도 사그러들 수 있지 않나.



그는 떠났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일곱 달이 지난 후에. 

나는 그저, 그가 나에게 했던 거짓말을 여즉 곱씹고 되짚어 꾸역꾸역 믿어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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