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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록 Sep 24. 2021

택시

은행을 피하다가


버스가 한 십오 분 남짓 남은 시간에 집을 나선다. 해가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모습을 보며,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태운다. 반은 잠에서 깨기 위함이고, 나머지 반은 밤에 꾸었던 꿈을 되새기기 위함이다. 담배를 다 피우면 버스가 오기까지 십 분 정도. 적당한 걸음으로 자리를 옮긴다. 작은 천을 건너며 올라오는 해 사진을 찍고, 이쪽을 멀뚱히 내려보고 있는 듯한 흰 달도 찍는다.


8차선 횡단보도를 건너고, 삼 분 남짓 더 걸어야 한다. 하필 그 길은 사람 두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작은 인도인 데다가 벌레를 쫓기 위한 은행나무가 줄을 지어있다. 가을이 되니 은행들이 후두두 떨어져 곳곳에 터져 있었다. 신발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오늘 나를 만날 이들의 코를 지키기 위해 이리저리 발을 놀려 그들을 피한다. 평소보다 두 배는 느린 걸음이었다.


' 이러다 버스 지나가면 재밌겠다. '


그런 생각을 한 지 이십 초가 되었는데, 요란한 엔진음과 함께 내가 타야했던 버스가 지나간다. 아무도 없는 정류장을 스쳐 저 앞까지 가버린다. 순식간에 머리가 텅 빈다. 와, 좆됐다. 서둘러 핸드폰을 켜 다음 버스 시간을 보면 삼십 분이 남았댄다. 난 그 시간에 사무실에 도착해야 한다. 출근을 한 이후 처음으로 택시 어플을 켰다. 이사를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여기가 어디고 핸드폰 속 빨간 동그라미는 어딘지 잘 모르겠다. 냅다 도착지를 설정하곤 콜을 부른다. 만 원. 내 한 시간 값이다.


아저씨와 할아버지의 경계. 그렇게만 그어두고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즉 담배 냄새가 가시지 않은 것 같아 고개를 휙휙 젓다 창문을 찔끔 내린다. 그 사이 택시 아저씨는 이런저런 대화를 건넨다. 슬쩍 보니 핸드폰 배경화면은 어린 아이다. 아마 손녀일 거다. 아, 네. 누가 들어도 성의없는 대꾸를 하며 오늘은 그의 대화를 받아낼 힘이 없다고, 혼자서 핑계를 댄다. 드륵드륵 흔들리는 창문에 머리통을 기대는데, 사실은 어깨가 아프다고 한다. 시선만 돌려 유심히 보니 왼손으로만 운전을 하고 오른팔은 거의 움직이지 못 하는 상태다.


왜요? 짧게 물으면 자신의 몸을 다쳐 자식에게 미안한 얼굴을 하는 듯이 멋쩍게 군다. 산악 자전거를 좋아하는 그는 삼성에 이십팔 년을 다닌 퇴직금으로 자전거를 샀다. 이후 몇 년간 자영업을 한다고 까불다가ㅡ그의 말이다ㅡ그것은 접고 택시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전거가 좋아서, 오르고 내리는 게 좋아 자전거를 타고 산을 타다 그의 몸이 고꾸라졌다. 십여 년 전에 비슷한 일로 오른쪽 어깨의 인대를 잃었으나, 그에 비해 이번 부상은 밋밋했다고 한다. 그래서 병원을 가지 않았더니 연휴 내내 고생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집에 사는 오십대 남성과 여성을 떠올리며 끄덕인다. 그 고집스러움을 누가 이기리.


피로함을 이겨내며 대화를 이어가다, 큰길가에 차를 세워 달라고 했다. 허허벌판에 골목을 따라 몇 걸음 들어가면 편의점이 나오는 곳이었다. 아저씨는 굳이 골목으로 차를 끌었다. 골목 들어가면 나오기 힘드시잖아요, 그냥 세워 주세요.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완고했다. 그렇게 카드를 받아들고 문을 여는 순간에 이상한 용기가 솟았다. 저희 할아버지도 자전거 좋아하셨어요. 마지막 인사라기엔 너무나 뜬금없었나 싶어 돌아보는 그의 눈을 멀뚱 바라봤다. 되려 제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그런데 마주한 두 눈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지금도 좋아하시나? 돌아가셨어요. 최대한 괜찮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의 또래이니, 그의 죽음을 알게 된다면 그의 아침이 서글퍼질까, 그의 어깨가 더 아플까 봐 뒤늦게 후회했다. 그는 씨익 웃었다. 나도 인제 준비해야지. 에이, 아직 아니죠. 안녕히 가세요. 그 말을 끝으로 아침의 첫 대화 상대가 떠났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그림을 배워두지 않은 것 또한 후회했다. 그의 어투와 눈빛은 훗날 작품이 될 거였다.


 그게 좋다고 했다.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고, 그리고 손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이 근방의 출퇴근길을 돕는 일이 지난 28년의 연장선 같다고 했다. 그가 견뎌온 세월의 고작 삼분의 일을 살아온 나는, 그의 고집으로 오늘의 녹슨 마음을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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