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원하는 길엔 딸내미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설 연휴를 앞두고 예쁜 색동 한복을 입고 간 어린이집에서 설맞이 민속놀이도 하고, 예쁜 복주머니에 선물과 용돈도 받았다며 자랑도 했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기 아쉬워 찾은 담작은도서관. 아빠와 재미있는 똥 그림책을 읽으며 장난도 치고, 사서 선생님께 사탕도 받았다. 아빠와 함께 공룡 벽화 골목을 걸으며 해가 저물어가는 붉은 하늘 구경도 했다. 아빠와 딸의 성공적인 저녁 산책이었다.
잠깐의 시내 드라이브 후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도착해 뒷문을 열었는데 어라, 해솔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신나서 갈매기 모양이 되었던 눈은 가자미 눈이 되었다. 연신 '힘들어', '피곤해'라고 하며 짜증이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엘리베이터에서는 온갖 심술을 다 부렸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에서 15층까지 올라가는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다른 사람들이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15층에 도착해 현관문 앞에 다다랐는데 바닥에 따개비 한 마리가 찰싹 붙었다. 얼마 전 50개월을 넘긴 초대형 따개비는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겨우 어르고 달래 떼어낸 후 누가 볼 새라 휙 들어온 집 안에서도 투정이 이어졌다. '배가 고프다', '졸리다'. 안아도 주고, 뽀뽀도 해 주고 겨우 달래 놓아도 아빠, 엄마가 동생 해담이를 예뻐해 주거나 걱정하는 말이라도 들으면 '나도'라는 말과 함께 투정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된다. 하원한 후 해솔이의 기분이 잔뜩 저기압이면 아내는 어린이집 가방에 있는 수첩부터 살핀다. 오늘 같은 날에는 어김없이 선생님의 "오늘 해솔이 낮잠 안 잤어요."라는 글이 적혀 있다. 오늘은 해솔이가 낮잠을 안 잔 날이다.
언제부터인지 나와 아내는 해솔이가 하원을 하면 낮잠을 잤는지 안 잤는지부터 확인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다. 해솔이의 낮잠 여부에 따라 그날 저녁 육아의 전략이 180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특별히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을 제외하곤 오늘처럼 해솔이가 짜증스러운 날은 보통 낮잠을 자지 않은 날이다. 이런 날에는 짜증에 맞짜증으로 대응하지 않아야 한다. 나는 오늘 부처님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인내하고 또 인내해야 한다. 저녁을 먹고 난 후 가능하면 빨리 씻겨야 한다. 그리고 서둘러 꿈나라 여행을 보내야 한다.
해솔이가 낮잠을 자고 온 날이면 기분이 좋다. 아빠, 엄마와 무엇을 하든 즐거워 보인다. 심지어 혼자서 그림을 그리거나 그림책을 보기도 한다. 이런 날에는 해솔이에게 과한 자극을 주면 안 된다. 자칫하면 꿈나라 여행을 떠나기 시작하는 시각이 늦어질 수도 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쉬이 잠이 들지 않는 아이 곁에서 소중한 육아퇴근 후 시간을 모두 날려 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최대한 아이를 자극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오늘의 즐거움, 기쁨을 잘 간직한 채 잠자리에 들 수 있도록 끊임없이 수면을 유도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산다.
아이의 낮잠은 참 딜레마다. 어느 것이 좋다고 이야기하기가 참 어렵다. 어린이집에서 낮잠을 안 자고 온 날에는 참 짜증스럽다. 속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수없이 되뇌며 참는 아빠, 엄마의 마음속에서 뜨끈뜨끈한 열이 오른다. 그래도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이른 육아 퇴근 시간이 주어진다. 운이 좋으면 영화 한 편도 볼 수 있고, 책도 읽고 글도 한 편 쓸 수 있다. 충분히 참을 만한 가치가 있다.
어린이집에서 낮잠을 자고 온 날에는 마음은 편하다. 상냥하고, 동생에게도 친절한 아이가 참 예뻐 보인다. 아빠와 함께 그림 놀이도 하고, 종이접기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논다. 책도 한 권 두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을 들고 와 읽어달라고 한다. 한 장 한 장 읽을 때마다 깔깔거리며 웃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나눈다. 나와 아내도 즐거워하는 해솔이의 모습을 보며 덩달아 즐겁다. 문제는 그 즐거움이 끝도 없이 간다는 것이다. 낮잠을 자고 온 날 해솔이의 기분 좋은 마음 대신 그날 아빠 엄마의 육아 퇴근은 없다. 함께 잠드는 일만 있을 뿐이다.
각각이 가진 장단점이 확실하다 보니, 어떤 것이 더 좋다 나쁘다 따지기가 참 어렵다. 딜레마다. 그저 육아의 일상이 무탈하게 되었으면 좋겠고, 육아 퇴근 후 자유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주어졌으면 좋겠다는 소박하지만 큰 소망만이 있을 뿐. 내일부터 설 연휴가 시작되는데 둘째가 어려 연휴 기간 내내 춘천에 꼼짝없이 있어야 한다. 집에 있으면 해솔이가 낮잠을 안 잘 텐데, 벌써부터 성난 티라노사우루스로 변한 해솔이와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아내와 나의 모습, 그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볼 해담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지만, 그래도 작은 소원이 있다면 이번 연휴 육아는 '약간 매운맛'이었으면 좋겠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즐거운 명절 연휴 보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