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상징과맥락 Mar 05. 2022

한국인의 문제적 언어패턴 #2 (사회적처벌, 사회공포)

사회적 처벌에 대한 공포, 사회 공포가 있는 사람의 언어 패턴

상황 2



지호는 동작 대교에 있는 한 자그마한 카페에 갔다. 날씨가 추워 메뉴판에서 따뜻한 음료를 찾아보다가 자몽차를 먹기로 하였다.


지호 : 자몽티 하나 주세요.

바리스타 : 네.

그리고 지호는 10분 후에 계산대에 와서 언제 음료가 나오느냐고 물어봤다. 지호 옆에는 손님 몇 명이 같이 음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호 : 자몽티 언제 나와요?

바리스타 :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직 먼저 주문하신 분 꺼 하고 있어요.

지호 : 네.

바리스타 : 그리고 ‘자몽티’가 아니라 ‘자몽차’에요.(바리스타는 메뉴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메뉴판에는 자몽티라고 적혀있지 않고 자몽차라고 적혀있었다.)

지호 : 네, 티가 차잖아요.

바리스타 : 네.



 바리스타의 언어 패턴은 사회적 처벌에 대한 공포(사회 공포)가 있는 사람의 언어이다. 사회적 처벌에 대한 공포가 있는 사람은 별말이 아닌데도 상대방의 말을 사회적 처벌로 인식해버린다. 바리스타는 지호의 질문 “자몽티 언제 나와요?”를 “자몽티가 왜 이리 늦게 나와요?”라며 불만을 제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지호에게 “자몽티가 아니라 자몽차에요.”라는 반응이 나온 것이다.



 물론 상황을 보면, 메뉴판에는 자몽티라고 적혀져 있지 않고 자몽차라고 적혀져 있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지적은 듣는 사람(지호)에게 아무런 유용성이 없는 지적이고 굳이 커피를 만드느라 바쁜 와중에 손님에게 할 필요가 없는 말이다. 이러한 불필요한 말을 바리스타가 하게 된 이유는 바로 지호의 질문(자몽티 언제 나와요?)을 사회적 처벌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지호의 사회적 처벌에 반발하고자 하는 반발심이 표현된 것이다. (사실 지호는 바리스타에게 사회적 처벌을 하려 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즉 바리스타 입장에서는 손님이 갑자기 나보고 음료가 왜이리 늦게 나오냐고 은근히 지적하였으니, 나도 손님에게 메뉴 이름이 자몽티가 아니라 자몽티이다라고 이야기하면서 대응을 한 것이다.



 이 대화만 보자면, 바리스타에게 큰 지적을 할 이유는 없다. 지호와 바리스타 간에 갈등이 생긴 것도 아니고, 지호와 바리스타 중 크게 감정이 상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리스타와 같은 언어패턴의 사람과 함께 일을 하다 보면 별 나쁜 의도로 한 말이 아닌데도, 가끔씩 상대방은 나에게 굳이 할 필요 없는 요구를 한다거나, 슬쩍 농담을 하는 척 나를 지적한다거나 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러한 사람은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사회적 규범에 의한 통제에 기반한 언어패턴, 그리고 사회 공포에 기반한 언어 패턴을 구사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서, 자식에게 계속해서 “이거 먹어야 몸에 좋다(‘건강’이란 규범).”, “이거 해야 너의 미래에 이득이 된다.(이득과 손해 차원의 합의된 기준)”, “너 엄마가 하라는 것 꼭 해라, 안 하면 큰일이 난다.” 등의 말만을 계속 반복적으로 하는 부모들이 있다.

 물론 이분들은 자식을 괴롭히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을 할 때마다 <부모 - 지시하는 사람 : 너 - 지시받는 사람>이라는 맥락이 형성된다. 물론, 부모가 자식에게 때때로 지시를 하고 자식은 그 지시를 따라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부모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동시에 상대의 감정에 무관심한 경우는 <지시자 : 이행자>가 아닌 다른 대화의 맥락을 일상생활 속에서 전혀 만들지 못한다. 그들은 오직 <지시자 : 이행자>의 맥락만 만들어서 상대방을 이 맥락 속에만 위치시키려고 한다. 그럼 자식은 숨이 턱턱 막히는 답답함과 분노를 느끼게 된다. 자신도 부모님에게 매번 “지시 받는 사람”으로 인지되는 것이 아닌 다른 존재로도 인지될 수 있는 다른 맥락을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언어패턴이 만들어가는 맥락을 인지하기란 모두에게 쉽지 않은 일이며 이것이 바뀌는 일은 더욱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러한 언어 패턴을 상시로 구사하는 부모는 오히려 자식을 정신적으로 병들게 한다. 이러한 부모가 만들어내는 언어패턴 속에서 자신이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의사가 묵살되고 무시되는 입장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과 욕망이 있음에도 감정과 욕망의 주체로서가 아닌 누군가의 지시대로 살아야 하는 인지 부조화 속에서 신경증적인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상시적으로 사회적 규범에 따라 통제를 하는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자신의 본질적 욕망과 감정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어떤 조건을 달성 및 성취했느냐가 개인의 감정 맥락 형성에 선결 조건이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어떠한 조건을 달성하였을 때만 부모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아왔기 때문에 계속해서 부모와 행했던 교류의 양식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의 바리스타는 지호의 질문을 그냥 평범한 질문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사회적 규범에 의한 통제(=왜 빨리 음료수를 만들지 못하냐?)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지호의 질문에 그냥 대답을 하면 되는데, 통상의 반응보다 더 과하게 반응(오히려 지호에게 지적을 하는 상황)한 것이다.



 이렇게 계속 상황이 악화 된다면, 마음속에 사회적 처벌에 대한 공포가 생기고 타인이 아무런 의도 없이 하는 말에도 민감도가 올라간다. 사회적 처벌에 대한 공포, 즉 사회 공포가 생기는 것이다. 상황이 더 심각해지면, 심각한 정신적 문제로 발전하여 상담사를 찾게 된다. 상담사는 당연하게도 부모님의 양육 방식과 언어 패턴에 대해 지적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부모는 오히려 자신은 자기 자식을 열렬히 사랑했다고 자기 삶에는 오직 자기 자식밖에 없었다고 자신을 변호한다. 물론 그들도 자식을 사랑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대화를 통해 형성한 맥락, 그리고 그 맥락 속에 상대방이 어떠한 대상이 되는지에 따라 사랑이 온전히 타인에게 전달되기도 하고 사랑이 아닌 억압과 통제로 전달되기도 한다. 자식을 사랑한다면, 사랑이라는 ‘기의’를 올바른 형식의 맥락에 담아 ‘기표’화 해야 한다. 더군다나 아이는 부모에게 자신을 위해 온몸 다 바쳐 헌신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냥 부모가 챙겨줄 수 있을 만큼 챙겨주고 나머지는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자식은 그것을 모방하여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다.



  사회 공포란 기분대로 행동하거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지 못하면서, 매 순간 사회적 잣대로부터 평가받는 상황 속에 자신을 인식하는 심리적 증상을 말한다. 예를 들면 횡단보도를 건널 때 그냥 건너면 되는데, 아무 이유 없이 "내 걷는 자세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주변의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평가 받는다"는 상상적 상황에 처해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갑자기 자연스러운 걸음걸이마저 인위적으로 신경을 써서 걸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사회 공포가 심한 경우 횡단보도를 걷는 아주 간단한 행위마저 쉽게 하지 못하고 매우 어렵게 하거나 아예 하지 못하기도 한다. 물론 개인마다 식당에서 종업원에게 말을 하는 것을 잘 못한다든가, 발표를 할 때 때 자신의 억양이나 단어 하나하나를 생각하거나 등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사회 공포는 발현된다.



 사회 공포가 있는 사람이 성장하여 부모가 된다면, 양육 과정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사회 공포가 있는 부모는 자식과 이야기를 할 때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항상 <사회적 잣대, 기준, 수치, 성취도>를 끌어와서 대화의 맥락을 구성한다. 자식과 긍정적인 감정 교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대체로 부정적인 감정, 혹은 감정이 없는 무미건조한 대화만 교류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언어패턴이 만들어내는 맥락을 들여다보면, 항상 특정 사회적 조건을 달성하지 못한 나, 그 기준에 못 미칠까 조마조마하는 나 등으로밖에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공동 과제를 달성하거나 일을 할 때, 혹은 업무 성과를 보고할 때는 어떠한 사회적 성과에 대한 성취도에 있어 잘해서 자랑스러워하거나 혹은 잘 못해서 아쉬워하거나 창피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 공포를 가진 사람은 업무와 전혀 상관이 없는 원초적인 일상의 상황에서도 비슷한 맥락을 만들어낸다. 자신의 솔직한 감정, 긍정적인 감정은 표현하지 못하고 사회적 약속이나 기준, 의무를 항상 우선시한다. 유년 시절 부모로부터 자신의 순수한 감정이 수용되기는커녕 계속해서 사회적 기준에 의해 묵살되거나 외면되는 맥락에 처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성인이 되어 부모님과 자주 소통을 하며 살지 않아도 부모와 구축한 맥락을 끊임없이 타인과 구축하려 한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부모에게 허락된 맥락이 오직 그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그는 부모와 맺은 약속을 계속해서 지키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회 공포가 있는 사람의 사정은 사실 안타깝다. 나 또한 심한 사회 공포가 있었다. 나는 발표할 때, 그리고 공개된 자리나 상황에서 나의 감정과 의사를 전혀 전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회 공포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회 공포를 가진 사람이 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주변 사람들 힘 빠지게, 지루하게 만든다고도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처한 대화의 맥락을 완성해가려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사회 공포가 있는 사람이 부정적인 감정, 수치스러운 감정을 기반으로 맥락을 만들면 같이 있는 사람 또한 어느 정도 같은 대화 맥락을 공유하고 이에 보충해주는 형태로 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 사회 공포가 있는 사람들은 같이 있는 사람을 자기와 함께 수치와 당황스러운 감정을 계속해서 공유하려고 한다. 상대방은 이런 맥락에서 벗어나 좀 더 행복하고 신나는 감정을 나누고 싶어도 사회 공포를 갖고 있는 사람은 이를 전혀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사회 공포를 가진 사람과 맥락을 공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줄어들게 되어있다.



 사회 공포가 심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들은 이성 관계에서도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사회 공포를 갖은 부모가 있더라도 딸은 이성 관계에 있어 남자만큼 어려움을 겪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남녀 관계에서 여성은 남자가 만들어낸 맥락에 들어가 보고 그 남자가 만들어낸 맥락이 좋은지 안 좋은지 선택하는 역할을 일반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는 굳이 남자에게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먼저 맥락을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에게 대화나 감정 교류를 통해 맥락을 먼저 형성해야 하는 남자의 경우가 문제이다. 남자는 자신의 감정, 남성성, 사랑 등을 언어와 비언어(표정 몸짓, 억양, 말투)를 통해 표현하고 이는 여성과 공존할 수 있는 맥락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형성된 맥락 안에서 남녀는 기억을 만들고 계속해서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자원(감정적 소통할 ‘거리’)을 만드는데, 사회 공포에서 파생된 맥락 안에서는 수치심, 공포심, 비열함, 비겁함 등의 감정이 어필되고 여성은 그 남성을 매력 있는 남자로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남성은 상대 여성이 일말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맥락을 조금도 형성할 수 없다. 상대에게 불확정성을 떠밀기도 하고, 무언가를 결정해달라고 하고(자기가 결정을 하면 사회적 규범에 의해 자기가 처벌받을 것 같은 공포심 때문에 어떤 음식을 먹을지, 어떤 카페를 갈지도 함부로 결정을 못 하고 눈치 보며 상대를 불편하게 한다.) 자신의 감정, 욕망 또한 표현할 수도 없다.(감정을 표현했을 때 부모로부터 수용 받은 적이 없어서.) 예를 들어 두 남녀가 길을 걷는 도중 비가 왔다고 치자. 그럼 만약 남자 쪽에서 우산을 갖고 있다면, 그냥 같이 우산을 쓰고 같이 가던 길을 걸으면 되는데, 사회 공포를 가진 남성은 어떤 타이밍에 우산을 펼쳐야 할지, 우산은 어떠한 각도로 들어야 할지, 우산을 언제 접어야 할지 등등의 의문에 혈안이 되어있어 결국 상대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이렇게 사회 공포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아들이 이성 관계에서 겪는 실패는 비참할 정도로 심각하다. 조금 직설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이러한 남성들은 정말 ‘거세’를 당했다고 할 정도로 이성과 관계 맥락을 형성할 수 없다. 이들의 삶에서 이성 관계는 정말 인생에 몇 없는 ‘매우 희귀한 현상’에 불과하다. 자연스럽게 발생해야 할 ‘사랑’이 개인의 삶에서 ‘매우 희귀한 현상’처럼 다가온다는 것은 크나큰 비극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호소하는 남성이 한국에 적지 않다는 사실 또한 슬픈 일이다. 이들이 겪는 고독감은 실로 매우 깊고 일상의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고독과 차원이 다르다. 그들 스스로 또한 그저 “외롭다, 고독하다.” 등의 언어로밖에 표현할 수가 없지만, 그들이 실로 겪는 고독감은 정말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가마득한 감정이다. 이렇게 일상의 언어로 기표화 될 수 없는 이러한 기의는 상에서 특정 대상에 대한 혐오와 공격 등으로 종종 기표화 되기도 한다.


작가의 이전글 한국 사람들의 문제적 언어패턴#1 - 욕망을 우회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