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가씨'는 뚜렷한 상징 구도가 드러나지 않아 다소 난해한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스토리 자체가 흥미로워서
이야기가 흘러가는 그대로 영화를 보아도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이야기의 흐름은 이렇다.
1.
조선인 사기꾼 고판돌(하정우)과 소매치기범 남숙희(김태리)는 큰돈을 벌 계획을 세운다.
그 계획은 히데코(김민희)라는 아가씨의 재산을 빼앗는 것.
숙희를 히데코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로 위장하고
고판돌 자신 또한 일본인 공작으로 위장을 한 후,
히데코로 하여금 고판돌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히데코와 고판돌은 아무도 모르게 떠나 결혼한 후
히데코의 재산을 모두 취한 뒤,
히데코를 정신병원에 갇히게 하여 세상에 히데코의 존재 자체를 지우는 것.
그리고 히데코로부터 취한 돈을 숙희와 같이 나누어 갖자는 것이
조선인 사기꾼, '고판돌'이
생계형 소매치기범, '숙희'에게 제안한 계획이었다.
2.
히데코는 평생을 자신의 이모부인
'코우즈키 노리아키(조진웅)'의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히데코는 평생 이모부의 바람대로
야하고 괴기스러운 내용의 야설 책을 부자 집 자제의
남성들한테 읽어주어
그들의 성욕을 충족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히데코를 온실 속 화초와 같다고 생각한 고판돌은
일본인 공작으로 위장한 후 코우즈키 노리아키에게 접근을 했지만,
히데코를 알면 알수록 그녀를 속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숙희 몰래 계획을 바꾸어
히데코에게 새로운 계획을 제안한다.
3.
고판돌은 자신에게 재산의 일부를 주는 대신
히데코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히데코에게 숙희의 신분을 주고,
숙희를 히데코로 위장시켜
정신병원에 감금시킨 후
히데코를 이모부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한 것이다.
4.
그러나 히데코와 숙희가 만나게 된 후
그들 사이에 동성애적인 감정이 싹트게 되고,
결국 그 둘이 살아남을 계획을 세우게 된다.
5.
결국 히데코와 숙희의 계획이 성공을 하게 되고
고판돌은 자신의 정체를 들키고 최후를 맞이한다.
영화 아가씨 - 히데코
· 소유와 지배, 그리고 믿음과 관계
우리는 대상을 완전히 100% 소유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와 결혼 생활을 해본다 가정해보자.
나도 상대를 사랑하고
상대도 나를 사랑한다.
그러나 평일이면 상대방도 일을 하러 회사로 향하고
자신 또한 일을 하러 회사로 향한다.
물론 상대도 나를 사랑하고 나도 상대를 사랑하고,
그리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상대방과 내가 다른 공간에 떨어져 있을 때,
상대방이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는 100% 보장이 있을까?
사실 그러한 보장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상대방이 바람을 피우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을까?
상대방의 회사와 내 회사 집무실에 cctv를 설치하여 근무 시간 동안 서로가 잘 있는지 감시할 수 있도록 확인해야 할까?
혹은 떨어져 있을 때 항상 상대방의 상황을 음성으로라도 확인할 수 있게 통화를 연결해두어야 할까?
보통의 대다수 사람들은
모두 이 두 가지 생각에 대해
너무 과한 생각이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우리 사회에 극 소수이며,
누군가 그러한 행동을 한다는 사실이 바깥으로 밝혀진다면,
오히려 사회적 비난을 받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보통의 사람들은
상대방이 다른 곳에 있을 때 바람을 피우지 않을 것이란
100%의 보장도 없이
어떻게 상대방과 잘 지낼 수 있을까?
그 이유는 인간의 관계는
물리적 증거나 보장과 같은 도구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형성되어있기에,
우리는 상대방이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 100% 보장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갈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타인을 믿는 법을 아예 모르는 사람은
타인을 믿지 않는 대신에
다른 이상한 증거와 보장을 갈구한다.
코우즈키 노리아키와 히데코의 관계가 바로
믿음이 상실된 관계라 할 수 있다.
코우즈키 노리아키는 히데코를 어렸을 때부터
심하게 학대하였고
심지어 자신의 고문실까지 직접 보여주며
히데코에게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영화 아가씨 - 코우즈미 노리아키
이는 코우즈키 노리아키가
히데코를 온전히 자신의 지배 하에 두기 위한 행동이었고,
히데코를 완전히 자신의 지배 하에 두려고 한 이유는
타인과 믿음을 통한 관계 형성 방법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코우즈키 노리아키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으로 태어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인으로부터
온갖 멸시와 고문을
당해왔다는 것을 몸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믿음 자체가
그의 마음속에 존재할 수 없었고,
믿음을 통한 관계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던 것이다.
믿음이 존재하지 않는 관계는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있다.
믿음이 존재하지 않는 관계에서
당사자는 믿음의 빈자리에 계속 무언가를 채워 넣으려고 한다.
믿음이 없으니,
상대방과 나의 관계가 지속되고 있는지 아닌지를
가시적인 증거를 통해 계속해서 확인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타인에게 명령을 하고
타인이 내 명령을 이행하는지를 확인한 후
관계가 유지되고 있음에 안정감을 느끼기도 하고,
타인이 내가 가한 고통을 참아내면
이를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로 여겨 안정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렇게 믿음의 빈자리를 대신한 이상한 요구와
증거들을 계속해서 상대방에게 요구하고
상대방은 점차 병들어간다.
이러한 관계의 방식은 부모 자녀 간에 자주 일어난다.
건강한 관계를 모르는 부모와 그의 자녀 사이에서 말이다.
영화에서는 코우즈키 노리아키와 히데코뿐만이 아닌
다양한 지배 관계가 등장한다.
고판철 또한 마지막에는 히데코와 사랑을 나누고 싶어 했는데,
사랑을 '지배'의 관계를 통해 나누려고 했고,
코우즈키 노리아키는 숙희를 포함해 많은 하녀들,
넓은 저택, 집사 등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고판철 또한 자신을 도와주려는 숙희를 배신하고
숙희를 그의 계획에 도구로만 사용한다는 점에서
지배라고 볼 수도 있다.
드라마는 사람과 사람과의 지배 관계가 얽히고설킨
내용의 영화이다.
영화의 배경이 일제 강점기였는데,
영화에서는일본인을 좋아하는 한국인이든,
일본을 좋아하지 않는 한국인이든
모두가 여성을 '지배'하려고만 한다.
결국 히데코는 자신을 지배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숙희'와 동성애적인 사랑과 미래를 함께 하기로 약속한다.
결국 영화는
여성성을 지배와 학대의 대상으로 밖에 대하지 못하는
남성성만이 존재하는 극단적인 환경에서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 이상 성욕
앞서 말했듯,
인간은 대상을 완전히 지배하거나 소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에 대한 완벽한 지배에
집착하는 사람은
자신이 대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가시적인 증거들로 확인하려고 한다.
이러한 경향이 심화되는 동시에 폭력성과 섞인다면,
코우즈키 노리아키처럼
고문과 신체 훼손을 악취미로 갖게 될 수 있다.
코우즈키 노리아키는 광적인 이상 성욕을 갖고 있다.
그는 책을 많이 모으고 더 많은 책을 보유하기 위해
애를 쓴다고 하여 처음에는 그가 문학에 굉장히 관심이 많고,
히데코에 대한 교육열이 엄청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가 모으고 있는 책들은 하나 같이
'스너프 필름'에 준할 정도의 기괴한 야설이었고
그 야설에 있는 내용들의 상당 부분을
실제로 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지하실에는 절단된 인간의 신체 부위가
여러 용기에 보관이 되어 있었고,
다양한 고문 및 절단 기구가 있었다.
이러한 그의 성향에는
자신이 누군가를 지배하고 있다는
상태를 끊임없이 확인을 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자신이 모종의 타인을 지배하고 있다는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극도의 불안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기에
자신이 타인을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에 대한 갈망의 빈도가 높아지고
증거에 대한 수위 또한 높아진 것이다.
즉 그의 깊은 마음속에는
내가 타인을 지배하거나 혹은
내가 타인을 지배하지 않으면 내가 타인에게 지배된다는 논리의
불안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코우즈키 노리아키의 이러한 특성 또한
나는 후천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코우즈키 노리아키는
일반인이 뚜렷한 증거와 이유 없이
갑자기 끌려가 고문을 받을 수 있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우즈키 노리아키와 고판철이 보여준
히데코와 사랑을 나누려는 방식이 하나 같이
상대를 지배하고 취하는 방식인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는 항상
폭력성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 있다.
올드보이에서는 주인공이 영화 마지막에 자신의 혀를 자르는 장면,
친절한 금자 씨에서는 금자가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는 장면 등.
이처럼 다른 영화에서 박찬욱 감독은
인물의 과거 이야기, 그리고 인물 간의 사건 등을 통해
폭력성이 터져 나오는 순간을 만들어냈지만,
이번 영화 '아가씨'에서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폭력성이 언제든 튀어나올 수 있는
특정한 시대적 환경을 이용하여
폭력성을 연출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