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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징과맥락 Feb 05. 2024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대한 심도 깊은 상징 해석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보는 기표와 기의로서의 세계

0. 서론


2023년 7월,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품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공개되었다. 개봉 전까지 공개된 것은 '새의 탈을 쓰고 있는 사람(?)' 같은 포스터 하나뿐이었다. 꽤나 단조롭다고 보일 수 있는 포스터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최고의 포스터"라고 극찬한 바가 있는데, 심플리스트로 유명한 하야오의 면모를 느낄 수 있으면서도 묘하게 신작에 대한 호기심을 자아냈다.


지난 하야오 감독의 작품들을 상기해 보면 정말 이번 신작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감독이 단순히 '어린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라고 했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수많은 상징과 메타포들을 한데 머금은 명작의 반열에 올랐다. 이뿐만이 아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하울의 움직이는 성', '천공의 섬 라퓨타', '바람 계곡 나우시카', '모모노케 히메' 등 거의 모든 작품들은 작품성을 넘어 우리들의 마음속 '노스탤지어'가 자리한 그 근처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


매번 그렇지만, 이번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또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작품일 것이라는 평이 많은 만큼, 이를 기념하여 하야오의 지난 모든 작품들에 대한 분석 칼럼을 진행할 예정이다.





1.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대하여 - 기본 구도


역시 첫 번째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다. 내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고 애니메이션을 통틀어서도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에 꼽힌다. 나는 이 작품을 되게 어렸을 때, 아마 내가 초등학교였을 때 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작품이 가진 따뜻한 그림채(?)가 인상 깊게 다가왔을 뿐 그 이상의 무언가를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우연치 않게도 나는 이 작품을 고등학생이 되어서, 대학생이 되어서, 그 후에도 몇 차례 보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작품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석들이 나왔고 이 작품은 단순히 센이라는 아이가 행방불명이 된 이야기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현재 인간의 무의식과 상징들에 대한 공부를 통해 나름의 관을 확립한 후, 이 작품에 대한 확고한 관점이 형성되었다. 물론 작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막고자 하는 바는 없지만 나에게는 이 작품에 대한 일종의 '해석본'이 생겼다는 뜻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우선 이 작품은 크게 세 가지 파트로 나눠져 있다. 첫 번째 파트는 주인공 치히로가 엄마, 아빠와 같이 새 집으로 이사를 가는 일상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치히로의 가족은 오래된 테마파크로 들어가 한 식당을 발견하고 부모님은 그 식당에서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그 후 부모님은 돼지가 되어버리고 치히로는 부모님을 잃게 되며 이야기의 두 번째 파트가 시작된다. 두 번째 파트는 치히로는 유바바라는 마녀가 지배하는 온천에서 일을 하게 되는 부분이다. 치히로는 온천에서 '센'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며 점차 본래의 이름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세 번째 파트는 치히로가 유바바로부터 빠져나와 부모님과 함께 일상의 세계로 돌아오는 부분이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부분은 두 번째 파트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온천'을 운영하는 유바바라는 마녀가 지배하는 세계. 이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돼지가 되고,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냄새마저 숨겨야 하는 세계(작중 초반 하쿠는 치히로에게 인간 냄새를 풍기면 안 된다 하였다.). 이러한 세계는 도대체 어떠한 세계일까? 우리는 이 세계에 대해 보다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이 정의를 통해 작품의 여러 설정들과 감독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2. 소쉬르의 언어학 - 기표와 기의  


우선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기표와 기의'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얼핏 지루할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애니메이션을 관통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나마 할 수밖에 없다. 기표와 기의는 프랑스 언어학자 소쉬르에 의해 확립된 개념으로, 사전적 정의로 기표는 말의 감각적인 측면으로 글자 그 자체 혹은 발음을 가리키고, 기의는 말의 의미적인 측면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바다'에서 기표는 '바다'라는 글자와 발음 등, 언어의 '형식적인 면'을 가리키고 기의는 우리가 '바다'라는 단어는 들으면 하나 같이 같은 것을 떠올리는 것과 같이 언어의 '의미적인 면'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쉬르의 언어학이 도대체 이 애니메이션 혹인 일본 사회와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3. 인간은 기표를 통해 소통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기표는 의미하고자 하는 것을 담아내는 그릇(형식)이라는 것, 기의는 의미하고자 하는 내용(의미) 그 자체이다.  '하트'라는 기호는 '♡'와 같은 형식(기표)을 지녔고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의미(기의)를 지닌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대상을 향한 사랑하는 마음(기의)을 '♡'라는 기표를 통해 표현한다. 이것을 기의가 기표로 변했다는 의미에서 '기표화'라고 하자. 자신의 기의(사랑이라는 감정)를 기표('♡')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항상 매일, 매 순간을 '기표화'를 해가며 살아간다. 예를 들어 운전을 하다가 앞 차에 경적을 울리는 것도 앞 파에 대한 모종의 분노(기의)가 경적을 울리는 행위(기표)로 기표화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우리의 '옷차림' 또한 기표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날의 모종의 감정(기의)이 옷(기표)으로 표현이 된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아주 사소한 눈웃음이라던가 표정, 제스처 또한 기표화의 산물이다. 가령 스마트 폰과 같은 기계나, 한 사회의 법, 혹은 특정 집단의 암묵적 룰과 같은 규칙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기의(노력)가 '기표화' 과정을 거쳐 탄생한 기표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기표는 단순 언어나 기호뿐만이 아닌 유형의 것에서 규칙, 법과 같은 무형의 것에 이르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기표의 개념을 확장하여 언어뿐만 아니라 제도, 규칙, 암묵적인 사회 규칙 등도 기표라는 개념으로 확장하고 싶다.)



4. 인간 그 자체도 타인에게는 기표로 존재한다.


단순히 인간의 언어, 물건뿐만이 아니라 사실 우리 개개인 또한 타인에게는 기표로 존재한다. 타인이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알 리도 없고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명함을 내밀곤 한다. 명함을 보면 이름과 직업, 이메일, 전화번호 등이 적혀 있죠. 이 명함이 다른 사람에게는 기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의 직업이 무엇인지에 따라다니는 회사가 어디인지에 따라 불 또는 호의 감정을 갖는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의 '외적인 조건(신체 및 사회적 조건)'에 끌리곤 한다. 아무리 그 사람이 좋은 이유를 만들어 내도 사실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기표(외모, 외모가 풍기는 분위기, 사회적 신분 등)에서 파생된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기표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기표는 그 사람의 모든 면을 다 보여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일부는 보여주기 때문이다.


명함이 그 사람의 모든 측면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내용을 A4 용지에 빽빽이 적어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모든 측면을 나열한 A4용지 뭉텅이를 주는 것이 아닌, 오히려 자신에 대한 정보를 소거하고 소거해서 결국 타인이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정보만 간략하게 간추려서 전달한다. 이것이 기의가 기표가 되는 과정에서 기의는 무조건적으로 소실될 수 없다는 기의 소실의 법칙이다. 자,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우리는 애니메이션 이야기로 돌아갈 수 있다. 복잡한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조금 더 기표와 기의의 이야기를 이어가겠다.



5. 허나, 기표는 기의에서 나오기에..


우리는 기표를 통해 소통하고, 기표를 믿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표뿐일까? 외모도 훌륭하고 사회적 신분도 높고 말도 너무 잘해서 말할 때마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사람이 사실은 한없이 차가운 마음의 사이코패스라면 그 사람의 기표가 진실하다고, 의미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기의를 중시하지 않고 기표만 중시하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솔직한 감정을 억누른 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사회의 암묵적인 룰이나 규칙의 테두리에 걸맞은 둘러대는 의미 없는 말만 하게 될 뿐이다. 어찌 보면 기표는 솔직한 마음, 기의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인데 목적을 상실한 수단만이 날뛰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센과 치히로라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기의의 측면이 묵살되고 오로지 기표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얼마나 이상할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6. 기의가 묵살되고 기표만이 중시되는 세계: 유바바가 있는 이상한 세계, 치히로 부모가 돼지가 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인간의 기의적인 측면이 묵살되고 기표의 측면만이 중시되는 여러 장면 중 하나로 치히로의 부모가 돼지가 장면을 꼽을 수 있다. 작중 초반 치히로의 부모는 돼지가 되는데 나중에 가서 유바바는 이유를 알려준다. 유바바는 치히로에게 치히로의 부모는 손님들을 위해 마련한 음식을 돼지처럼 먹어버렸기 때문에 돼지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고 이야기를 한다.


도둑질은 보통 불법적인 행동이지만 저마다의 사연이 있을 수 있기에 아주 드물게는 눈 감아주거나 죄를 묻지 않는 경우도 있다. (또한 엄청난 형벌이 가해지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친한 이웃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최근에 해고가 되어 돈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가 갑자기 내 가게에서 빵을 훔쳐간다. 이러한 경우, 그 사람에게 인격을 박탈할 정도의 심한 형벌을 내리는 경우는 인간 사회에서 보기 드물다. 아무리 그 사회 내의 기표로 자리 잡은 규칙 <'손님으로서만' 가게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라는 규칙을 어겼더라도 그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사람은 그의 행위를 이해하여 넘어갈 수도 있고, 혹은 벌은 받더라도 무거운 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바바는 <'손님으로서만' 가게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라는 규칙을 어긴 것 만으로 인격이 박탈되는 형벌이 내려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말한다. 이는 유바바가 도둑질이라는 행위를 특별히 싫어해서가 아니라(유바바가 '도둑질'에 트라우마가 있다던가, 특히나 싫어한다던가 하는 설정은 없다.) 법과 질서와 같은 무형의 기표를 어기는 대상에 대한 처벌의 형태로 행해진 것이다. 치히로 부모님의 기의(배는 고픈데 가게 주인이 없어서 돈이 있어도, 음식 값을 지불하지 못해서 나중에 지불하겠고 지금 우선 음식을 먹겠다는 의사)는 아예 묵살되고 손님으로서 음식을 먹지 않았다는 기표만 고려한 현상인 것이다. 이처럼 기의가 아닌 기표만을 중시하고 기표로 인해 처벌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의 마음이나 욕망(기의)이 아니라 오로지 기표로 인해 사안이나 안건이 추진이 되는 경향이 높은 사회가 바로 '기표 중심적인 사회'이다.




이 하쿠의 대사 또한 유바바의 세계는 기표 중심의 사회라는 것을 보여준다. 부모가 돼지가 된 후 치히로는 겁이 나 도망을 쳐 어느새 강가에 다다랐다. 그 후 치히로는 부모를 아예 잃어버렸다는 슬픔에 울고 있었는데, 이때 하쿠가 나타나 치히로에게 "이 세계의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너는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즉, 이 세계의 물건을 소비하는 '소비자'라는 사회적 기표로서 이 세계에 일정 시간 동안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세계에서 순식간에 없어지고 말 것이라는 의미이다.



유바바라는 마녀가 지배하는 세계는 이처럼 '기표'가 되지 못하는 존재들에게 너무나도 가혹하다. 이는 기표를 극단적으로 중시하는 일본 사회를 미야자키 하야오식으로 매우 훌륭하게 풀어낸 것이다.





7.  불확정성과 확정성


앞서 말했듯 우리 인간은 타인에게 어떠한 기표가 되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믿음직한 남편이 되어야 하고,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운 여인, 자상한 아빠, 따뜻한 엄마, 능력 있는 동료, 재미있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 기표가 된다는 것은 타인이 나라는 존재를 확정할 수 있는 무언가가 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나라는 존재를 타인과 나 스스로에게 확정한다는 의미이며, 내가 세계의 여러 대상들과 맺은 일종의 약속(계약)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녀는 학교 선생님이라 하자. 그런데 A는 너무나 학생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나머지 학생에게 친구에게 하는 말투와 스탠스를 취한다고 헤보자.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반복된다면, 시간이 지나 학생들은 그녀를 선생으로 존중하는 말투와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며 A 또한 동료 선생 혹은 상사에게 톤 앤 매너에 대한 지적을 받을 수 있다. 이는 A가 암묵적인 사회적 룰을 어긴 것이라 할 수 있고, 학생에게 올바른 기표로 다가가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스탠스와 억양, 태도 또한 기표이다.)


하지만, 그녀가 집에 돌아온다면, 그녀는 더 이상 '선생님'으로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녀의 자식에게는 '어머니'로서 그리고 그녀의 남편에게는 '아내'로서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그녀의 성 정체성을 비롯한 여타 조건을 고려할 필요가 있지만, 이 예시에서는 A가 이성애자이며 남편이 있다고 가정함.) 우리는 특정 누군가에게 특정한 기표가 될 필요가 있지만, 이 또한 대상에 따라 다를 수 있고, 꼭 한 가지의 기표만 되리라는 법칙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은 확정적인 면도 갖고 있지만, 불확정적인 면 또한 갖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어머니라고 해서 시종일관 24시간 365일 '어머니'로 살 수는 없다. 어디 소속의 사원이라고 해서 항상 사원으로 행동할 수는 없다. 누군가의 친구라고 해서 모든 곳에서 누군가의 친구로 있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학생'인 당신에게 매 순간을 '공부'를 위해 살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회적 본분을 다하라는 충고가 아닌 '폭력'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특정한 대상으로 살아갈 필요가 있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 자신의 불확정성도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한다. 인간에게 불확정성이 없다면 우리는 노예이자 인형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릴 것이다.




8. 온천탕의 손님들 = 완벽한 기표가 되어버린 인간들


그런 점에서 유바바의 온천에 찾아오는 손님들은 인간의 형상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불확정성을 상실당한 완전한 기표가 되어버린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일본 작품이기에 일본 사람들을 묘사했다고 볼 수 있는데, 작중 초반 손님들이 배에서 내려 유바바의 온천으로 향하는 장면에서 흥미로운 설정들을 몇 가지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작중 초반에 여러 신들이라 일컫는 손님들이 배에서 나와 온천탕으로 향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신들이라 부르는 존재 또한 배의 문을 여는 순간에는 가면만 보이는 투명한 상태였다가, 서서히 투명한 상태가 풀리면서 각자의 형상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또한 온천탕에 손님이라는 사회적 명목을 지닌 순간에야 비로소 유바바의 세계에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감독 나름의 방식으로 연출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쿠 또한 유바바의 세계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저 '신하쿠'라는 이름의 강이었지만, 마녀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면서 그 또한 자신만의 사회적 역할을 찾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유바바라는 마녀에게 마법을 배워 유바바의 심부름꾼이 되어버렸다. 이 마녀의 세계에서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강이라는 대자연의 일부마저 그것의 모든 불확정성을 상실당한 채 오로지 하나의 기표로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 존재 자체의 존엄성(존재의 당위성)을 송두리째 잃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마녀의 세계는 인간이 사는 세계가 아니라 단지 사회적 역할(기능), 사회적 신분만이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세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감독이 왜 하쿠의 정체를 난데없이 인간이 아닌 강으로 설정을 했는지와 연결을 지을 수도 있겠다.




9.  왜 하쿠의 정체가 '강'인가?


하쿠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은 영화 전체에서 클라이맥스에 해당되는 순간이다. 즉 영화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는 말이다. 치히로가 하쿠의 진짜 본래 이름, 코하쿠를 말해주는 바람에 하쿠는 자신의 본명을 기억해 내고 용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사실 민감한 분들은 느꼈을 수도 있는데, 이때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다. 하쿠의 설정에 관한 것인데, 하쿠의 정체는 치히로가 어렸을 때 신발을 잃어버렸던 장소인 신하쿠 '강'이 하쿠의 정체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감동적인 장면이지만, 하쿠가 치히로의 잊힌 기억 속에 있었던 또 다른 가족이라던지, 애틋한 마음을 가졌지만 헤어지게 된 남자아이라던지 등의 우리에게 좀 더 자연스러운 설정이 나오지 않았다. 감독은 왜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왜 갑자기 '강'이라는 설정을 집어넣은 것일까? 이러한 자연스러운 흐름을 깨고서라도 인간뿐만이 아닌 더 영험한 자연마저 유바바라는 마녀의 세계에서는 모든 불확실성을 상실당한 완전한 기표로 전락당한다는 것을 표현해야 감독 자신이 바라보는 '마녀의 세계'에 대한 관점이 더욱 확실히 확립되기 때문이다.


또한 지브리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모든 것은 룰에 따라야 한다."라는 세계관에 의해서 하쿠는 유바바가 말한 대로 자신의 몸이 찢기는 것을 스스로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다는 정보를 찾아볼 수 있다. 이 또한 유바바의 세계가 극단적인 기표 중심 세계였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 룰 또한 기표의 종류 중 하나이다.) 치히로의 부모가 아주 조그마한 룰을 어겨서 존엄성을 잃게 된 것처럼 하쿠 또한 기표(규칙)를 어긴 것에 대한 무거운 처벌을 받는 것이다.




10. 유바바가 지배하는 세계 = 극단적인 '기표' 중심의 일본 사회


그러므로 유바바가 지배하는 세계의 모든 존재는 인간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사회적 역할, 사회적 기능, 사회적 신분만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이 세계의 존재하는 대부분의 존재가 온전한 인간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인간은 본래 불확실성과 확실성을 동시에 내재해야 하는 존재인데, 유바바의 세계에서는 불확실성을 거세당하고 오로지 확실성만을 추구하여 기표가 되어야 하는 일종의 '왜곡'된 존재가 되기 때문에 인간의 모습에서 조금씩 변형된 요괴의 모습을 지닌 것이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모습은 인간과 다르더라도 하는 행동은 인간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는 점에서 요괴의 모습은 일종의 맥거핀으로 보셔도 무방하다. (또한 인간의 모습에서 변형된 정도가 많을수록 기표화의 정도가 더 심하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가마 할아범을 보면, 그의 외형 자체가 그의 업무에 너무나도 찰떡이다. 가마 할아범과 일하는 아주 조그마한 숯덩이들도 그들의 모습이 그들의 너무나 낮은 사회적 신분, 그들이 하는 일에 완전히 최적화가 되어있다. 이들 외에도 유바바의 세계에서 치히로를 제외한 모든 존재가 자신이 맡은 사회적 기능, 위치에 따라 기표화가 완전히 진행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애니메이션이 일본 작품인 만큼, 유바바의 세계는 사실 일본 사회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은 전 세계에서 가장 기표 그 자체가 사회 문화 행동 양식에서 커다란 사회적 역학으로 작용하는 사회이다. 몇 백 년 동안 가업을 이어가는 현상, 아버지의 직업을 아들이 물려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시되는 일본 사회의 면면들은 기표를 탄생시키는 인간의 기의의 측면이 아닌 과거 관습, 관성으로 존재하는 명시적, 암묵적인 룰(기표) 그 자체가 인간을 통제한다는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단순히 가업을 물려받는 현상 외에도 많은 면면들이 기표 중심주의적인 특성에서 파생된다고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들은 이 글에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일본인들의 이러한 측면은 사무라이가 지배하던 시절이 천 년이상 지속되어 형성된 일종의 집단 신경증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사무라이는 자기 기분대로 살인, 고문, 강간 등을 할 수 있었기에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이 맡은 바에만 충실하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기표 중심주의 사회의 장점도 있지만, 아무래도 감독은 단점을 더욱 의식한듯하다. 우선 기표 중심주의 사회의 장점으로는 해당 사회에서 생산되는 기표에 대하여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음식점을 간다고 치자. 그럼 맛없는 음식을 만드는 음식점으로 갈 확률이 낮다. 기표 중심적인 사회에서는 음식의 ‘맛의 수준’ 또한 일종의 약속처럼 형성이 되어있기에 어느 정도의 맛의 수준을 보장받을 수 있다. 이는 사실 음식뿐만이 아닌 그 나라가 생산하는 상품 전반에 해당된다고 봐도 된다. 일본 회사의 제품은 종류를 불문하고 전 세계의 사람들에 의해 사랑과 신뢰를 받고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잘 아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일본 제품은 퀄리티가 좋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신뢰가 있는데, 이는 기표를 중시하는 일본 사회의 특성에서 파생된 현상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어떠한 일을 할 때 매뉴얼만 제대로 지킨다면 일정정도 책임에서 자유롭다는 점도 장점이다. 보통 사회에서는 개개인의 비언어 및 사회적 스킬로 대처해야 하는 영역까지도 일본과 같은 기표중심적인 사회에서는 일종의 ‘매뉴얼화’가 진행이 되어있다. 따라서 그저 편하게 매뉴얼대로만 행동을 하면 어느 정도 책임 추궁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은 비교적 소극적 성격의 사람들에게는 장점이 될 수 있다. 허나, 활발하고 외향적인 사람들에게는 숨 막히고 자신의 자유 및 제한된다고 느낄 것이다. 개인의 기지와 재량이 명시적 차원에서 개입될 여지가 적은 사회인 것이다.


기표중심주의 사회의 단점은 개인의 자유 및 감정 표현 자체가 제한된다는 점이다. 명시적 차원과 암묵적 차원에 걸친 기표화 자체에 제한이 가해지다 보니, 개인의 욕망 및 감정을 발산할 수 있는 출구 자체가 좁혀지고 억압된다. 자신의 기의(감정 및 욕망등)를 기표화하는 것은 인간에게 매우 근본적인 욕망이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매사에 기표화를 하고 살아간다. 행동, 말, 생각 등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는 '기표화'의 일환인 것이다. 그렇기에 기표화를 하지 않는 상태 자체가 인간에게 심리적, 신경증적 고통으로 치환되기 때문에 일본과 같은 극단적 기표중심주의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는커녕 자신의 감정 자체가 억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는 집단적인 신경증으로 이어지고 신경증의 정도가 심한 경우 정신병으로 발전한다. 실제 일본은 가장 면적당 가장 많은 정신병원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어, 2018 OECD 국가 간 인구 천 명당 정신병상 수 분포는 일본이 2.63으로 전 세계 1위이다. 2014 ~ 2020 년 통계에서 모두 일본이 독보적 1위이다.)


기표는 보통 기의가 '기표화'된 결과를 의미한다. 하지만 극단적인 기표중심주의 사회에서는 기표화된 기의로서의 기표가 아니라 기표화, 기의로부터 단절된 기표만이 존재하고 그 자체로서 영향력을 갖는다. 기의와 기표화로부터 단절된 기표는 인간의 마음(기의)으로부터 해리되어 있으며 이는 인간을 무의식적 차원에서부터 억압한다. 극단적 기표 중심 사회는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기표(규칙)가 아닌 그것과 오히려 해리된 성향이 높은 기표(규칙, 룰) 자체가 중시되어 그 기표 자체가 인간을 헤치는 경우도 많고 수많은 정신 질환 및 상처를 야기하기까지 한다.


자신의 기의, 기표화와 차단된 기표에 짓눌리기만 하면 결과적으로 개인의 자아는 붕괴에 이른다. 자신의 상징 세계와 현실 세계의 접점이 모두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재를 작가는 '가오나시'라는 캐릭터로 표현한 듯하다. '가오나시'와 같이 욕망 및 감정 기표화의 통로가 제한된 사람은 이상 성욕을 가질 확률이 높고 상대방과 진정 어린 소통이 불가능하다. '가오나시'가 센을 탐했던 점, 다른 존재들을 야만스럽게 잡아먹었던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오나시가 일반적인 상태로 돌아왔을 때는 제대로 된 단어 하나 말하지 못하는데, 이러한 세세한 설정에서 나는 작가의 세심함에 감탄하곤 한다. 인간의 '말'이야말로 인간의 대표적인 기표화 방법 중 하나인데, 이 '가오나시'가 말을 하지 못하는 설정이 기표화의 통로가 모두 차단된 존재를 표현하기에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매우 적절한 연출이기 때문이다.


11. "자신의 원래 이름" 그리고 사랑


유바바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릴수록 유바바의 지배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0으로 수렴한다. 이 애니메이션에서는 자신의 본래 이름을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부각한다. 우리에게 이름은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인간은 확정적인 측면도 갖고 있지만, 무한한 불확정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 하나하나를 하나의 단어로 규정할 수 자체가 없다. 한 단어로 규정하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폭력이자 억압이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마다 '이름'을 만들어 그 '이름'으로나마 자신의 무한한 불확정성까지 포섭하여 자신의 존재를 허술하게나마 규정한다. 이름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름을 존중하는 것이 사랑이다. 이름으로도 다 담을 수 없는 개인의 불확정성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 이것이 대상의 존재를 존재 자체로 받아들이는 방법이자 작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계와의 소통 방식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려는 자,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그 이름에 다른 이름을 덧대려는 자, 이러한 사람은 타 존재를 존중하기는커녕 기만하고 자신의 발아래에 두려는 자이다. 우리는 기표를 통해 소통하지만, 기표가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타인이 지닌 기표를 통해 타인을 규정 지어선 안되고, 나 또한 타인이 만들어낸 기표에 의해 완전히 규정되어서도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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