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빅테크의 원조 네이버가 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당장 사업이 어려워지거나 경쟁사에 뒤쳐지거나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혁신과 열정을 기반으로 쌓아온 회사 이미지가 무너지기 직전이기 때문이죠. IT 공룡 기업으로 살을 찌운 이후, 조금씩 진행돼 온 조직 문화 균열은 이제 붕괴를 걱정해야 하는 수준입니다.
기존 제조업과 다르게 새로운 IT 서비스를 창출해서 팔아야 하는 빅테크 서비스 기업의 조직 문화는 유연해야 합니다. 또 혁신성과 자율성이 보장돼야 미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네이버는 어떤가요?
지난 5월 벌어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40대 직원의 극단적 선택 사건은 네이버 조직 문화의 폐쇄성과 의외의 보수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줬습니다. 이 사건이 드러나면서 혁신 기업의 대표주자 네이버는 사라졌습니다. 대기업이 돼버린 네이버의 조직 문화는 재벌 대기업의 조직 관행과 다를 바 없음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고용노동부는 네이버에 대한 특별관리감독에 들어갔고, 지난 7월에는 '직장 내 괴롭힘이 만연했다'는 결과를 발표하기에 이르렸죠.
이러한 직장 갑질이 벌어진 회사가 '네이버'였기에 그 충격은 더 컸습니다.
한성숙 네이버 대표를 비롯한 경영진들도 이번 사건으로 인해 깨달은 바가 있었을 터. 지난 6일 2021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부 국정감사 증인으로 출석한 한 대표는 올해 말까지 회사의 구조와 리더십을 바꾸겠다고 말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다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말까지 네이버의 구조와 리더십을 바꿔나가는 과정을 밟고 있으니 지켜봐 주세요.
5월 직원 사망 사건의 가해자인 개발 관련 임원 A씨, 그리고 직장 내 괴롭힘 등의 문제로 퇴직해야했던 A씨를 다시 불러들인 최인혁 전 네이버 최고운영임원(COO)에 대한 적절한 징계 조치는 아직 없습니다. 최 COO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겸직하던 네이버파이낸셜 대표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최인혁 대표는 이해진 네이버 GIO(글로벌투자책임자)와 함께 해온 네이버의 창업 공신입니다.
네이버는 국내 벤처·스타트업의 신화입니다. 오너 경영 체제의 기존 대기업과 달리 맨땅에서 현재의 성공을 일궈냈습니다. 삼성SDS 출신의 이해진 창업자를 비롯한 창업멤버들의 열정, 그리고 혁신에 대한 갈망과 시도가 밑거름이 돼서 무럭무럭 자라난 것이죠.
창업 공신들은 그 성공에 걸맞는 보상을 받았고, 네이버 핵심 임원으로 조직 안에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아마도 균열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네이버의 리더십은 '나를 따르라' 방식입니다. 열정적으로 일하고 성공한 경험을 가진 리더들은 직원들에게도 그러한 DNA를 심으려고 하기 때문이죠. 오너 경영인 세습 체제 하 대기업의 1세대 창업자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현대그룹 정주영 창업주의 "임자, 해봤어?"라는 말이 추앙을 받던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있는 것처럼 말이죠.
시대가 바뀌었고, 심지어 네이버는 혁신 정신 위에 세워진 미래지향적 이미지를 갖고 있는 기업입니다. 이러한 시대착오적 행태가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과거 네이버 소속 취재원들의 면면을 보면, 늘 일에 쫓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동종업계 대비 업무량이 많기로 유명했고, 조직장의 관리도 매우 빡빡했죠. 수평적인 조직 문화라고 홍보를 했지만 수직적인 위계 질서가 조직 정서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업무량이 너무 많거나 혹은 상사의 엄격한 조직 관리를 견디지 못해 이직하거나 퇴사한 사례를 수차례 접했습니다. 네이버 출신이 유독 많은 카카오의 조직 문화와는 사뭇 다릅니다.
과거 네이버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자율출퇴근제를 도입했을 때 조차, 네이버 직원들은 리더(팀장, 셀장 등)의 허락 없이 자율적으로 시간을 쓸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수년이 지난 지금은 개선이 됐겠지만, 최근 벌어진 직원 사망 사건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어찌됐건 한성숙 대표는 이번 일을 계기로 네이버의 내부 문화와 제도에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고 인정했고, 자체적인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국감에서 한 대표는 "네이버 내부에 미흡한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됐다. 고인의 사망과 관련해 매우 충격을 받았고 또한 바꿔야 할 부분은 다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리더십 전체의 변화를 예고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 대표는 "경영진 모두가 관련된 부분 책임이 있다. 그 부분 대해서 연말까지 방안 마련하겠다. 연말까지 네이버의 구조와 리더십이 모두 교체되는 과정이 진행될 예정인만큼 잘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했습니다.
한성숙 대표는 지난 2017년 3월부터 4년 반 가량 CEO를 맡고 있습니다. 전임 대표인 김상헌 대표가 8년간 CEO를 역임한 것에 비하면 짧은 기간입니다. 한 대표의 재임 기간 동안 안정적인 성장을 유지해 왔기 때문에 교체 시기가 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지난 해 부터 네이버 CEO 교체설이 일각에서 흘러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번 대대적인 리더십 교체 과정에서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는 호사가들의 입방정이 나올 만도 하죠.
이번 사건 전까지는 최익혁 전 COO가 한성숙 대표의 뒤를 이을 유력한 차기 CEO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창업멤버에 속하는 채선주 최고커뮤니케이션책임자(CCO) 부사장 또한 차기 CEO설이 돌았었지만, 이번 직장 내 괴롭힘 논란으로 최근 인사총괄직 업무를 내려놓는 등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네이버 미디어센터장을 역임한 유봉석 네이버 서비스운영총괄의 하마설도 나돕니다. 김상헌 전 대표처럼 창업멤버가 아니면서도, 네이버 조직 문화를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나온 소문인 것이죠.
일단 네이버는 최고경영자(CEO), 최고운영책임자(COO), 최고커뮤니케이션책임자(CCO), 최고재무책임자(CFO) 등으로 이뤄진 경영진 구성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CEO를 교체할 것이라는 단정은 아닙니다. 다만 이러한 네이버의 변화가 직장 내 괴롭힘으로 드러난 조직 문화의 문제점에서 출발했고, 네이버 노동조합 측의 '경영진이 가해자를 비호해 온 정황이 확인됐다'는 주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기존 경영진의 직책이 유지될 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앞서 네이버 이사회 변대규 의장은 "급성장의 결과 조직 규모가 커지고 업무의 복잡성이 증대되는 속도가 지금의 CXO들에게 요구되는 책임을 압도하고 있다"면서,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이뤄지는 경영 체계의 변화가 새로운 조직문화를 만들어 가는 소중한 시작점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습니다.
대표이사나 창업멤버 몇 명이 회사를 이끌어 간다는 기존의 관습적 조직 문화를 정확하게 진단했고, 이를 뜯어 고친다는 의미가 담겼죠.
이렇듯, 네이버는 '건강하지 못한 조직'의 치명적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도약을 위한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어쩌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네이버가 지난 시절 골목상권 침해 논란으로 지탄을 받을 때 '프로젝트 꽃'을 통해 중소상공인과 상생하는 묘안을 내놓은 것 처럼, 건강한 조직 문화를 만들 수 있는 묘안을 생각해 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