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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수 May 21. 2024

'단호박 치즈케이크'가 필요한 데이트

단호박 치즈케이크


달디단 단호박은

짭조름한 치즈맛을 만나면

더욱 진하게 감칠맛이 더해진다





거리에도 이제 여름빛이 완연하다

반듯반듯 줄지어져 있는 아파트를 지나 

인적이 드문 골목을 만났다     


저 멀리서 거리낌 없이 다가오는 고양이 한 마리

우연이 아닌 듯 착 달라붙어 애교를 부리는데,     


찾았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곳     


커다란 초록나무 아래 비치는 햇빛은

군데군데 화단을 정리하던 정원사의 노고를 비추었다   

  

여기까지 잘 찾아왔니?

엄만 물었다     

점심은 잘 챙겨 먹었어요?

나는 물었다     


우리는 디저트 코너를 기웃거렸다

부드럽고도 짭조름한 치즈를 좋아하는 나

몽글하고도 달디단 단호박을 좋아하는 엄마

오늘의 간식. 단호박 치즈케이크     



나보다 스무 살 넘게 많은 엄마와 깊은 대화를 나누기로 한 약속은 잘 지켜지고 있었다.     

엄마가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자, 얼음이 달그락거린다     


한창 바빴을 때 말이야

여유를 전혀 생각하지 못하던 때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았던 적이 생각나, 요즘에.

주부로서 직장인으로서 피로가 이만저만 아니었겠지만, 제 삶에 충실하게 살았다는 만족감으로 피로를 덜어냈거든     

넌 어땠어? 

예전을 생각해 보면 말이야?     


여유가 없었죠

숨이 막혔던 적도 제법 있었고요

나는 가느다란 노란 잎이 띄워진 따뜻한 차를 조심스럽게 마셨다.

입안이 온통 허브향으로 가득했다     


역할이 하나였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부모님의 꿈을 대신 이뤄주는 사람이 아닌,

건강이 약한 동생을 챙겨줘야 하는 작은 엄마도 아닌

내 미래를 상상해 보며 설레기도 하고 걱정도 해보고 열정도 불태워 본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친구들이랑 노는 게 재밌고 동생에게는 잘 놀아주는 언니로 지냈으면 어땠을까- 싶었죠

우린 그때 어떤 사람이 있었다면 생각이 유연해졌을까요?     



바람이 불자 야외테라스에 자리한 여름빛 나무들이 흔들거렸다

저 멀리서 노곤하게 풀린 듯 잠든 고양이를 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엄마와 나는 어려운 시기를 지나,

 일상을 벗어나서, 

여기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참 신기할 따름이었다     


벽면을 에워싼 빈티지한 소품들, 

자유분방하게 늘어선 초록 식물 가운데 

헬로보루스 화분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마침 엄마는 지금 원예일에 심취해 있기에, 

통기성 좋은 빈티지 토분을 두고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무성한 초록잎을 만지작거리며 엄만 물었다     

네가 이런 곳을 오자고 하니까 감성이 살아나네.

넌 여기가 왜 좋았어?     


주인님의 개성이 분명하잖아요

고양이. 플랜테리어. 빈티지 소품들

어떻게 하면 창의적으로 아름답게 사람들에게 보여줄까

고민한 흔적이 느껴져요

대화를 방해하지 않는 감각적인 음악.

앉은자리마다 머무는 시선에 따라 트인 공간감.

진해서 좋아요     

엄마는요?     


플랜테리어 하기에 참 효율적이다 싶네

식물들이 잘 지낼 수 있도록 배수공간이 잘 되어 있어서 대단하다 생각했어

원예일을 하는 만큼 품종도 궁금해지고

빈티지 토분 이렇게 이용하면 오래 쓰기도 편하고 실용적이잖아     


 순간 웃음이 터졌다

우린 진짜 달라요, 그렇죠?     


네가 아녔으면 내가 이런데 와서 커피 한 모금 여유롭게 하겠니?

10년 전에는 진짜 인스턴트처럼 더했지

권위의식도 심해서 무얼 시작하는데 진짜 어렵더라

그러다 책 한 권을 읽게 되었어

권위의식 하나 없이 차근차근 사업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충격받았다니까.     


그렇다. 

그 수많은 책은 엄마 삶의 지반을 흔들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내게 아주 진심으로 추천하셨으니까 말이다.

빛깔을 바꿔가며 줄 그어져 있던 낙서들.

삶에 치여서 생각하지 못했던 엄마의 소중하고도 작은 꿈도 엿볼 수 있었다     


저도 자료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관점이 달라졌죠.

김영하 님 책이었어요.

관점을 좀 더 넓게 디자인하고 싶다는 욕구가 올라왔거든요.

유별나게 특별하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아마 약해진 건강 탓에 그랬지 않았나 싶다.

두툼해진 약봉투에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오로지 목표는 건강한 삶이었다. 한 달에 몇 번씩 기차 지하철을 번갈아 가며 병원을 오고 갔는데 기복이 심해지면 괜히 마음이 울적해졌으니까.

마음에도 근육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 찰나에 발견한 책이었다.     


이제는 엄마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나 싶었다

작은 시골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해본 반항이 이모를 따라 도시로 가겠다는 엄마였으니까. 그렇게 아빠를 만나 대체적으로 그 생각에 동의하며 지내온 세월. 엄마 역시 건강에 적신호가 생기면서 달라졌다.      



낮잠을 늘어지게 잔 고양이들은 하나둘씩 일어나더니, 경계 없이 근처를 두어 바퀴 배회하기 시작했다.     

 

우리 둘 다 알맹이가 필요했던 거죠

알맹이 사냥을 이제 본격적으로 해야겠는걸요

우습게도 좀 더 진지모드로 들어가면

지금 여기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도 나답게 무얼 도와줄 수 있을까?

여유로워진 지금의 내가 과연 10년 전 나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타임슬립도 한다고요     


어느새 녹아 작아진 투명한 유리잔의 얼음을 보며 엄마도 끄덕였다

우리 둘 다 중심이 필요했네

특히 네가 편안해졌으면 좋겠어     



건너편 옥상 건물이 코앞 가운데까지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지막 남은 케이크 한 점을 입안에 쏙 집어넣자 온몸이 사르르 녹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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