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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성국 Nov 03. 2021

사회생활 잘하네

부조리에 쉽게 순응하는구나

    소유 욕망과 노동 욕망의 불일치에 의해 누군가는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 인간이 좋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 있다. 식량, 의복, 집, 의료, 교육 등이다. 누군가는 이런 재화 및 서비스를 생산해야 하며, 만약 모두가 그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사회가 붕괴할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 전체의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전체 인구의 90%가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농사를 짓고 싶은 사람은 10%밖에 없다고 가정하자. 모두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 인구의 90% 가까이는 굶을 것이다. 따라서 농사하기 싫어하는 사람 중 누군가에게 농사할 것을 강제해야 한다. 그래서 돈이라는 재화 교환 매개체를 만든 뒤, ‘노력하면(하고 싶든 하기 싫든 수요가 많고 공급은 적은 노동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라는 슬로건을 세뇌하여, 하고 싶지 않은 식량 생산을 하게 만들었다.


    수요가 많고 공급은 적은 노동에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쏟을수록 가격이 높은 생산물을 많이 생산하게 되고 그 생산물을 돈으로 교환한다. 돈을 많이 모은 사람을 노력했다며 칭송해준다. 그런 사람을 칭송하지 하지 않아서 모두가 다시 하고 싶은 일만 하게 되면 인구의 90%는 굶어야 하기 때문이다.


    재산의 축적은 물질적 욕망을 충족할 수 있게 한다. 게다가 그런 사람을 칭송하기까지 한다면 이는 강력한 인센티브가 된다. 이런 인센티브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요가 많고 공급은 적은 재화를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내게 하고 기술을 개발하게 하여 혁신을 이뤄낸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인구의 90%가 굶는 상황을 소유 욕망과 노동 욕망의 불일치라는 우연적 요소에 의한 게 아니라, 개인의 책임에 의한 것으로 전환한다. 이를 개인의 책임이 아닌 우연적 요소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하기 싫은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고 여기게 되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일을 하도록 동기부여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근면의 가치를 세뇌할 수밖에 없다.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슬로건이 개인에게 동기부여가 된다는 주장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때로 하기 싫은 일을 하게끔 동기부여하기 위해 속이는 말이며, ‘노력’와 ‘성공’의 의미를 곰곰이 따져보면 과연 진실에 가까운 문장인지 의심스럽다.




    성공은 무엇인가? 많은 자산을 축적하거나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올랐음에도 중년의 나이에 자신의 삶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방황하는 사례를 우리는 종종 접한다.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타인을 의식하여, 좋아하고 싶은 것을 좋아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질문에 답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성공인가? 세계 최고가 되는 것이 성공인가? 이런 질문에는 반드시 ‘왜?’가 함께 따라야 한다. 돈을 모으는 것이나 세계 최고가 되는 것은 삶의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은 재화나 서비스를 교환하는 수단이다. 돈이 삶의 목적이라면 죽을 때까지 돈을 쓰지 않고 벌기만 하다 죽는 삶을 긍정해야 한다. 그런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돈을 모으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누군가 주장한다면, 돈을 어디에 쓰기 위해 버는 것인가를 반드시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야 한다. 그 ‘어디에 쓰기 위해’가 삶의 목적이 될 수 있을지언정, 돈을 모으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세계 최고가 된다는 것도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야 한다. 무엇을 위에 최고가 되고자 하는가? 최고가 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면 최고가 된 후의 삶은 무엇인가? 최고가 되는 게 삶의 목적인 사람은, 최고가 되고 나면 자살할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목적이라면 그렇다. 삶의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자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최고가 되기 위해서만 삶을 산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 다른 무언가를 위해 살아간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맛있는 것을 먹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들으며,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산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자살하지 않는 것은 ‘다른 무언가’를 위해 최고가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의 목적이 최고가 되는 것이라고 누군가 주장한다면, 그는 무엇을 위해 최고가 되고자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야 한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성과만을 쫓아 살다가 어느 순간 돌아보니 길을 잃었다고 느끼는 것이다. 사회적 잣대로 판단했을 때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사람 중에는 삶의 목적을 뚜렷이 하여 그에 따라 삶을 살아온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분들이 방황한다거나 되려는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돈만을 쫓으며 살다가 돈이 좋은 삶의 본질은 아님을 늦게 깨닫는 분들도 있는 것 같다. 성공은 돈을 축적하거나 세계 최고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성공의 수단일 뿐이다. 진정한 성공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좋은 삶일 것이다.




    산업혁명의 본질은 재화 생산의 주체가 인간에서 기계로 전환되는 것이다. 농업인구 1인당 식량 생산량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과거에는 전체 인구를 먹이기 위해 인구의 90%가 농사를 지어야 했지만, 현대에는 전체 인구의 10%만 농사를 지어도 전체 인구를 먹이고 남을 만큼 생산한다. 이는 자본주의에 의해 가능했다. 수요가 높은 재화의 생산력을 높이는데 에너지가 집중되게 할 수 있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묘하게도 자본주의가 지속되어 생산성이 향상됨에 따라, 하기 싫은 일은 기계가 대신해준다. 하기 싫은 일을 사람이 안 해도 될수록 자본주의에 의한 동기부여는 줄어든다. 4차 산업혁명이 대두되며 생산성 향상 속도는 더 빨라지고 있다. 생산성이 향상되며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까워지면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이것이 자본주의에 내재된 모순이다. 결국엔 모두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는 사회가 올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열심히 할 수 있다. 뭘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냐만이 문제가 된다.

*한계비용: 재화나 서비스를 한 단위 더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추가 비용

   

    여전히 사회 전체의 물질적 욕망을 충족하고 질서 유지를 위해서 우리가 퍼뜨려야 할 슬로건은 ‘노력하면 성공한다.’ 일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까? 개인의 좋은 삶을 위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할 대체 슬로건은 '하고 싶은 걸 하는 것이 성공이다' 또는 '하고 싶은 걸 하면 노력한다'가 아닐까. 나는 이런 슬로건들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여긴다.




    내가 보기에, 사회생활이란 단어는 부조리를 합리화하기 위해 남용되는 것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생활이란 사회적 수요가 높은 가치와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가 일치하는 일부 사람을 제외하면, 노예생활이다. 장원의 인구를 굶기지 않기 위해 하기 싫어도 농사에 종사하는 농노들처럼 우리도 하기 싫은 일을 할 것을 강요받는다. 사회의 수요와 개인의 욕망이 불일치하기 때문에 누군가는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


    무엇을 하고 싶을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만약 사회적으로 농업 종사자의 수요가 높은데 내가 농사를 좋아한다면,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은 선택할 수 없기에, 이는 운에 의해 결정된다. 운에 의해 결정되는 것임에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것이 노력(이것을 하기 싫은 일을 꾹 참고 하는 것이라 정의한다면)에 의한 것이라고 세뇌하는데, 그래야 하기 싫은 일을 하게 하는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 사회의 물질적 수요를 충족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력하면 너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수 있어."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이 말은 참이 아니다. 꾹 참고 살아도 그런 날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운에 의한 것(개인의 책임이 아닌 것)을 노력에 의한 것(개인의 책임인 것)으로 치환하므로 이는 부조리하다. 부조리해 보이는 상황을 문제 삼으면, “사회생활이 원래 그런 거야”라는 말이 돌아온다. 부조리에 쉽게 순응하면 “사회생활 잘하네”라고 한다. 따라서 누군가 당신에게 “사회생활 잘하네”라고 말하면, 반성해봐야 할 일이다. “주변을 잘 챙기는 따뜻한 사람이구나”라는 의미인가 “부조리에 쉽게 순응하는구나”라는 의미인가.



참고서적

제레미 리프킨, 『한계비용 제로 사회』,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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