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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성국 Jan 28. 2022

정치의 비극

    축구를 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 공식적인 룰에 따르면 22명이 필요하다. 어린 시절 축구를 하며 중고등학교 운동장을 전전하다 보면,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에 운동장의 다른 무리와 경기를 할 때가 있다. 이때는 반드시 22명이 뛰어야 할 필요는 없다. 몇 사람이 뛸지 합의를 하면 그게 곧 룰이 된다. 오프사이드 규정이 없이 뛰는 경우도 있고(심판이 따로 없기 때문에 오프사이드 룰을 적용하면 시비를 따질 일이 너무 많아진다.) 골이 들어갈 때마다 골키퍼를 교체해주기도 한다(동네 축구에서 골키퍼를 전담하고 싶어 하는 선수는 별로 없기에 모두가 즐겁기 위해서 이런 룰을 적용한다). 선수 교체 횟수의 제한도 없다. 이런 룰은 보통 따로 합의하지 않아도 관습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다 각자가 생각했던 룰이 어긋날 때가 있다(예를 들면 스로인, 파울, 코너킥 등). 어긋남에 종종 날 선 말들이 오가기도 한다. 서로 기분이 상하기도 하지만, 이후엔 어떤 룰에 따르자고 합의하고 원만히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축구의 규칙엔 답이라고 할 만한 게 있다. 축구는 인간이 만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정한 것을 답이라 할 만하다. FIFA에서 정한 룰이다. 답이 있긴 하지만, 동네 축구의 룰은 FIFA의 룰을 어길 수도 있다. 동네 축구에서 반드시 FIFA의 공식적인 룰을 따라야만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드물다. 참가자끼리 합의만 된다면 축구는 진행된다. 동네 축구에선 그렇게 하는 게 더 즐겁다. 합의는 거창한 일이 아니다.




    사회 제도에 답은 없다. 사람마다 옳다고 여기는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삶의 경험이 다르고, 같은 경험을 했더라도 뇌가 입력을 처리하는 경향이 다르다. 따라서 어떤 공동체가 따라야 할 사회 제도는 답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구성원들의 합의에 따라 달라진다. 금전적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사람마다 규범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느냐에 따라 불쾌해하거나 편안해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동성애자가 금전적˙물질적 해악을 끼치지 않더라도, 사회 제도가 그들로 하여금 떳떳한 생활을 영위하게 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긴다.


    모두가 자신에게 금전적으로 이득이 되고 자신이 안락하고 편안하게 느끼는 규범을 채택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규범을 나에게 이득이 되게만 정할 수는 없다. 양보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며, 어느 정도를 양보해야 하는가 만이 문제가 된다. 눈곱만치도 양보할 마음이 없는 사람과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리 없다.


    합의에 따라서 사회 제도를 채택하는 것은 공정하고 정의롭다. 옳음보다 쉬움을 공정의 잣대로 여기는 사람은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대한민국 5천만 명이 공동의 규범을 합의한다는 건 요원해 보인다. 아무리 정의롭대도 그렇게 어려운 방법을 택하느니, 쉽게 하나의 답을 가정하고 싶다. 그래서 하나의 답을 고집하는 독재자가 때론 많은 사람의 지지를 얻어 민주적 정당성을 갖고 득세하는 것이다. 다수결이 곧 민주적인 것은 아니며, 합의 없는 다수결은 다수에 의한, 소수에 대한 독재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합의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양보하고 포용해야 한다. 국가의 규범을 합의한다는 건 거창하게 느껴진다.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많은 공동체에 속해있다. 내가 속한 작은 공동체(마을, 동호회, 동창회, 조별과제, 회사, 학교 등)부터 공동의 규범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합의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동네 축구의 룰을 정하듯이.




    정치의 비극은 답이 없다는 데서 온다.


    정치에선 성공과 승리가 구분된다. 정치의 승리는 표를 많이 얻는 것이다. 하나의 답이 있다고 믿는 정치인이 정치에 승리한다. 답은 없고 그저 서로 양보하고 합의해야 할 뿐이라고 대중에게 주장하는 정치인은 지지를 받지 못한다. 뚜렷한 답을 제시할수록 표를 많이 받는다.


    정치의 성공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하나의 답이 있다고 믿는 정치인은 정치에 실패한다. 민주적 사회가 더 나은 사회라면 정치적 성공을 위해선 합의를 잘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이 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상대의 주장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선거 운동 기간만 되면 우리는 네거티브 폭격을 목격한다. 그것이 바람직한 정치의 방식은 아닐 것이다. 정치인도 그걸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이 네거티브를 멈추지 못하는 건 그것이 정치에서 승리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티브이에 선거 후보자가 출연해 정책에 대해 논하면 사람들은 곧 채널을 돌린다. 그러나 상대 후보 혹은 후보 가족의 사생활의 비난하는 기사의 조회수는 치솟는다.


    우리는 승리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성공하는 정치인을 칭송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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