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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Feb 23. 2021

사건 당일, 박원순을 생각하다

20. 7. 10 

무섭다. 살이 떨린다.


내가 실제로 말을 섞었던, 존경하던 정치인이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는 중범죄를 저지른 뒤, 죄가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목숨을 던졌단 사실이.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면 안 된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많이 존경했던 정치인이었다. 그는 한국 시민사회의 상징 같은 인물이었다. 일찍이 소액주주운동을 이끌어 반자본주의밖에 모르던 어설픈 한국 운동권 마르스크주의자들에게 사회 개혁과 민주적 진보의 점진적인 방식을 일깨운 사람이었다.


박원순은 자신의 잘못이 변명의 여지가 없는 크나큰 죄악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몸을 던졌다. 자신의 변명을 곧이곧대로 믿고 싶어 할 아내까지 동원해 "불륜"이라는 언론 플레이로 피해자 김지은을 몰아간 누구와는 달랐다고 할 수도 있지만, 왜 굳이 이런 점까지 들춰내며 난 그를 다르게 기억하려 하고 있을까. 가해자에 공감하는 것이 2차 가해로 이어진다는 지적을 알지만, 정치인 박원순을 이렇게 보내는 것을 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동료 시민의 절반을 타협과 정치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먼저인" 반쪽짜리 민주주의자들의 퇴출 신호탄으로 봐야 할까. 희극적 아마추어였던 박근혜의 퇴출은 진보 정치를 닦는 개혁적 정치 축제의 장이었지만, "파도가 밀려오는데 조개를 주울 수 없다"는 반성 없는 반쪽짜리 민주주의자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누가 들어올 것인가. 김지은의 가해자가 철창 뒤에 갇히고, 시민사회의 기둥이 뽑혀 나간 자리를 다원주의와 페미니즘으로 무장한 새 세대의 정치 신인들이 채우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다지 녹록치 않아 보인다.


분명한 것은 박근혜를 몰아낸 것이 촛불혁명이었던 만큼, 운동권 마초 진보의 불완전하고 이중적인 정체성이 탄로나고 있는 지금이 또 다른 혁명이라는 점이다. 다만 수십만 명이 희생된 프랑스 혁명이 나폴레옹 황제의 반동 정치로 허무하게 끝났듯, 민주당 '진보' 여혐 꼰대 아재들이 물러간 자리는 트럼프 같은 포퓰리스트와 정치 혐오주의자들이 채울지도 모른다. 역사는 큰 틀에서 진보하지만, 한 인간의 삶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의 스펙트럼 안에선 진보와 퇴보를 반복한다.


인간은 다면적이면서 나약한 존재고 누구든지 권력을 가진 한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을 다시금 뼛속 깊이 되새긴다. 박원순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서울시장이자 여권의 거물 대선 후보로 보낸 기간만 9년이다. 크나큰 권력과 기나긴 시간은 70년대에 최고 명문인 경기고, 서울대를 나와 사법 시험에 합격하고도 검사 영감님 자리를 1년 만에 박차고 나와 "옳은 길"을 걸은 박원순 같은 사람조차 쉽사리 타락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긴다.


난 30년 뒤 오늘의 나에게 떳떳한 사람으로 늙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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