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혜 외,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
<말괄량이 길들이기〉, 《달과 6펜스》, 《안녕 내 사랑》, 《위대한 개츠비》, 《나자》, 《그리스인 조르바》, 〈날개〉, 〈메데이아〉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본 익숙한 제목들일 것이다. 읽어보진 않았더라도 "~를 위한 필독서 목록"에 빠지지 않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작품들. 중학생이라면, 고등학생이라면, 대학생이라면, 교양 있는 사회인이라면 '필독'해야만 한다고 생각해 왔던 작품들은 아직까지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작품들을 그저 '고전'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 비판 없이 '좋은 작품'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걸까?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은 우리가 고전, 걸작, 꼭 읽어야 하는 명작으로 불리는 작품들을 여성의 시선으로 '다시 읽기'하며 당시의 시대를 재조명하고, 그때와 그렇게 달라지지 않은 지금 사회를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이 책이 나오게 된 계기가 흥미로웠는데, 이라영의 서문을 보면,
"여성을 모욕하는 걸작들 사이에서 형성된 미적 감수성에 길들여지지 않으려면 의식적으로 여성의 문장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2020년 출간된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 줄 필요는 없다>의 한 문장이다. 이 문장에 영감을 얻는 편집자가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을 써보자고 제안했고, 흔쾌히 수락했다. 다만 나 혼자 쓰는 것이 아니라 여러 필자와 함께 쓰기로 했다. 더욱 다채로운 관점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보게 된 정희진의 <서평의 언어> 북토크에서 '편집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시대이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 문단을 읽으면서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실 이 방송에서 정희진 선생님이 이상(작가) 관련된 원고를 넘겨야 하는데 계속 미루고 참여한 북토크라고 하셨는데, 이 책에 수록된 원고가 바로 그 글이어서 제일 먼저 읽어볼 수밖에 없었다. ㅎㅎ
이상은 진짜.. 칭찬하면 이제 칭찬 식상하다고 하고, 조금만 건드려도 칼날이 꽂히기 때문에 웬만하면 잘 안 다루는 작가인데 ㅋㅋㅋ 나도 학부생 때 이상의 세계에 엄청 빠져서 '모던뽀이'를 한참 외치고 다녔던 기억이.. (시 <오감도>, <건축무한육면각체> 뜻도 모르면서 찾아 읽고 김연수의 <꾿빠이, 이상> 읽고, 관련 영화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정말 옛 기억 소환 안 돼서 네이버 검색해 봄 ㅋㅋ)
그러고 보면 이상의 <날개>나 박태원의 <천변 풍경>,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읽으면서 그저 식민지 '지식인'에게만 방점을 두고 나라를 잃어 괴롭지만 지식인으로서 할 일이 없어 마냥 거리를 걷는 그들의 눈으로, 그들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정희진은 이상의 <날개>를 그저 지식인의 고뇌로만 읽는 것은 "읽기의 진부함"이라고 표현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기 재현의 가장 큰 정치적, 윤리적 문제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외부를 동원할 때 여성이나 젠더 메타포를 필수 요소로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미소지니다. 미소지니적 재현에서 여성은 언제나 대상화되고 부차화된다."
'나'(이상)는 혼나는 아이다. 이러한 관계는 남성이 공사영역에서 이중 노동을 하며 힘겹게 사는 아내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고 살면서도, 자신이 아이처럼 취약한 존재라며 피해자 정체성을 주장할 수 있게끔 한다. 한국사회에서는 이러한 전도와 부정의가 의심 없이 수용된다. 이것이 미소지니다.
정희진은 이를 "식민지 남성성"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아직까지 대한민국이 '식민지 남성'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정희진의 의견에 동의한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사회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날개>의 아내가 성 판매 여성임을, 그 때문에 이 작품이 오독되고 있으며, 성 판매 여성과 한국 사회의 역사를 글에 잘 펼쳐놓았다. 그러고 보면 <날개>는 아직도 문제적 작품이다. 다만 그 시선이 '나'가 아니라 '아내'의 입장에서 계속 다시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라영은 이 같은 시도를 "문학적 역공"이라고 칭한다. 이런 시도를 할수록 왜 자꾸 딴지를 거냐, 그 시대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거냐, 이미 죽고 없는 작가를 붙들고 어쩌자는 거냐는 물음이 당연히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시선을 돌려보면 '이 같은 고전'이 우리 삶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드라마는 어떤가. 가난하지만 제멋대로인 여주인공 (하지만 늘 긍정적이고 쾌활하며 '당연히' 예쁘고 귀엽기까지 한)을 떠올려보자. 첫 몇 장면에서 분명히 그는 생기 넘치고 자기 할 말 당당하게 다 하는 여성캐릭터였다.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에서 이긴 하지만) 그런데 '남주'를 만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남주는 그게 돈이든, 권력이든, 신분상승이든 어쨌든 여주를 자기 식대로 '훈련'시킨다. (물론 극 중에서는 '그 모습 그대로가' 신선해 보이는 것처럼 등장한다)이 익숙한 플롯이 셰익스피어라는 이름과 맞닿게 된다면, 와, 진짜 이건 사골국이라도 너무 우려먹은 거 아닌가 싶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읽으면서 카타리나의 변신(마치 금쪽이처럼!)에 어느 정도의 쾌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카타리나의 마지막 대사들,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순종적 태도를 보면 위화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비판적 읽기가 작품의 의의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 중에는 시대와 함께 호흡하며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계속 읽어볼 만한 흥미와 매력을 지닌 작품도 있지만, 냉정한 재평가를 통해 '고전', '걸작'의 자리에서 빼버려도 아무 문제가 없는 작품도 있다. 예술적 남성 동맹이 추구해 온 자유, 아름다움의 개념과 방향성을 의심하지 않으면 전위는 불가능하다.
고전 작품이니까, 하도 유명하다니까 읽긴 읽는데 뭔가 고구마 먹고 있는 듯한 답답한 느낌이 든다면, 그건 '지극히' 당연한 감정이라는 걸 이 책은 말하고 있다. 뭘 읽든, 뭘 보든 다른 시선으로 읽는 비판적 독해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