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정, 하미나 <상처 퍼즐 맞추기>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돌봐야만 남을 돌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런 방법에 대해서 서로 나눌 수 있어야 하고요."
이 책의 부제는 '타인의 슬픔을 들여다보는 여자들이 건넨 위로'이다. 이 부제가 이 책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이현정과 하미나라는 두 여성이 서로 편지를 주고 받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둘은 살아온 세대도, 살아가고 있는 환경도 다르지만 '타인의 우울'을 들여다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 작업이 쉽지 않음에도 계속 하고 있는 이유, 계속 할 수 있는 힘에 관해 이야기한다.
사실 하미나 작가의 <미괴오똑(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을 읽고 나서 날씨가 너무 좋아 하늘을 바라볼 때, 맛있는 커피를 마실 때 왠지모르게 인터뷰이들이 생각이 났다. 잘 있었으면 좋겠다. 어딘가에서 멋진 풍경을 바라보고, 맛있는 거 챙겨먹고 버텨냈으면 좋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는 꼭 죄책감이 밀려들어왔다. 내가 과연 그런 걱정이나 할 자격이나 될까.
고통의 이야기들을 오랫동안 채록해오면서 제가 느낀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느끼면서도 그 고통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고, 알더라도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에요. 물론 느끼는 것과 아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에는 각각 간극이 있겠죠. 아픔을 느껴도 무엇 때문에 아픈지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또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를 알더라도 어휘에 한계가 있거나 사회적으로 이해되기 어려운 언어기에 표현하기 어려울 수도 있죠. (99쪽)
책의 중반부 쯤, 두 사람의 의견이 맞부딪치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진정한 '대화'라는 게 이런 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그 입장에서 최대한 이해하지만 그건 그거고 ㅎㅎ 나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 생각을 최대한 받아들이고, 또 내 입장에서 이야기해보는 것.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 받은 기간은 2년 남짓? 그 기간이 길기 때문에 편지를 시작할 때는 하미나작가의 책이 출간되기 전이었다. 그래서 하미나 작가가 <미괴오똑>을 출간 하기 전, 출간 후 느꼈던 감정들이 편지를 통해 드러나 있었던 점도 좋았다.
저는 이번에 우울증 책을 쓰면서 이 작업을 통해 제게 남은 것이 '절망하지 않을 책임'이라고 느꼈어요. 책으로나마 이야기의 끝을 맺을 수 있는 사람으로서 내게는 그런 책임이 주어졌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하미나 작가와 편지를 주고 받는 이현정 교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동경받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다시 서울대로 돌아와 교수로 일하고 있는 여성. 하지만 그런 삶에 대해 정작 이현정 작가는 "너무 바쁘다 보니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찬찬히 생각해보지도 못한 채 소모해 버리는 거"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렇게 꽤 오랜 시간 선생님과 편지를 나누고 보니, 제가 선생님께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감정은 절망과 외로움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보면 훌륭한 커리어를 쌓으며 지내온 시간들을 선생님께서는 "소모해버렸다"고 말씀하세요.
둘이서 나누는 편지에서 또 하나 좋았던 점은, 두 사람이 서로의 이야기의 사실관계나 옳고 그름에 관해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숨어 있는 '감정'을 적확하게 짚어내고 그것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 책이 훨씬 더 깊이있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세대, 모든 사람에게는 상처가 있다. 그 상처를 인정하고, 그것들을 꺼내 충분히 이야기하고 슬퍼하고 좌절할 수 있다면,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대가 있다면 세상은 좀 더 살 만하지 않을까.
이 책은 동녘의 맞불 시리즈 - 두 작가가 주고 받는 편지로 구성된 대화들- 중 세 번째 책이다. 앞의 두 권도 읽어봐야지. 그리고 곧 출간될 책들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