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영희,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
자신의 삶을 날 것 그대로 내놓은 글을 보면 며칠 동안 그 세계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길을 걷다가도,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을 봐도 그 속에 등장했던 인물이 떠오르고, 그들의 삶을 되짚어보게 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정신이 나가 있다. 양영희 감독의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를 읽고 한 동안 이들의 이야기가 내 삶 속에서 계속 반복해서 떠올랐다.
이 이야기는 한 가족의 이야기이지만, 그 가족이 살아내야 했던 삶은 우리 모두가 외면해 왔던 일이고, 우리가 다시 직면해야 하는 '가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양영희 감독은 '재일 조선인 2세'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양영희 감독이 누군지 몰랐다. 세 편의 영화 역시 보지 않았다. 재일 조선인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갔다가 광복이 되면서 국적을 되찾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감독의 아버지는 조총련의 간부가 될 만큼 북조선 정부에 열성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자신은 북한에 가지도 않으면서 아들 셋을 북한에 보내고, 여전히 북한 정부를 찬양하는" 아버지를 감독은 이해할 수 없다. 감독은 "가족을 향해 카메라를 든 이유도, 도망치기보다 그들을 제대로 마주 본 다음에 해방되고 싶어서였다."라고 말한다. 가족을 이해하려는 수많은 시도 중 하나가 바로 카메라로 자신의 가족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가족에게서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원거리에서 응시하고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싶었다. 살아온 날들을 해부하여 내 백그라운드의 정체를 넓고도 깊게 알고 싶었다. 그런 다음 가족과 나를 분리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감독은 가족을 촬영하기 시작한다. ‘카메라’만큼의 거리를 두고서야 감독은 조금씩 부모님의 행동을 해석할 수 있는 여유를 갖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아들 셋을 모두 보낸 거, 후회해?"라는 감독의 질문에 "안일했지."라고 말한다. 감독의 아버지는 "열혈 조총련 간부" 였기 때문에 감독은 아버지의 솔직한 대답에 놀라기도 한다. 힘든 상황에서도 북한에 있는 자식들에게 돈과 물건을 마련해 보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어머니의 삶 또한 다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감독은 오랜 시간 동안 거리를 두고 부모님을 지켜보며 가족이라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다만 아버지도 이 정도는 말하게 해주고 싶었다.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하는 생각은 누구나 할 테니까. 아버지의 영상이 담긴 <디어 평양>을 공개하자 조총련에서는 감독의 북한 입국을 금지한다. "부모님이 인생을 바친 조직의 판단으로 가족은 또 한 번 이산가족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다.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고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일 조선인은 죽어서도 고향에 가지 못한다. 감독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제주도에서 태어났지만 한국 국적을 가지지 못한다. "남북과 조일 관계"가 개선되지 못해 감독의 아버지는 결국 평양에 무덤을 만들기로 했다.
감독은 자신이 만든 영화 때문에 평양 방문이 금지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라, 국민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살기 좋은 나라'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선명하게 보여서 흠칫 흠칫 놀라곤 했다.
감독은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면서 집에 걸려 있는 김일성, 김정일 주석의 초상화를 치우기로 결심한다.
어떻게든 초상화를 치우는 장면을 넣고 싶었다. 넣어야 했다. 나 자신과의 결별로서, 새롭게 걸어 나가기 위한 생의 마디로서, 낡은 시대에 고하는 결별이자 가족과의 결별이기도 했다. '그런 시대는 이제 끝냅시다! '하는 결별. (중략) 북에 가족이 있어서 아무 말 못 했던 시대를 끝내고 싶었다. 이제 충분하지 않나. 무엇보다 나는 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 책이, 양영희 감독의 가족 이야기가, 그저 가족이 가진 인간주의적이고 감동적이고 희생적인 면모를 보여주며 끝내는 것이 아닌, 새로운 도전이고 시작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는 오빠들과의 이별, 오빠들의 실생활을 알게 된 어머니의 희생,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 조카에 대한 감독의 마음.. 물론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들도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로 인해 실제로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지금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낡은 시대를 뒤로 하고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