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경청>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말"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어쩌면 내가 쓰는 이 글도 그 "말" 중에 하나겠지. 수많은 "말"들은 하나같이 외친다. 내가 맞다고. 나는 억울하다고.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내 말을 들어달라고.
김혜진의 <경청>은 수없이 쏟아지는 말, 그 속에 서서 '듣는' 이야기이다. 말이 쉽지, 듣는 건 어렵다. 이 책의 주인공인 임해수는 '말'에 대해서는 자신감을 가진 심리 상담사이다. 그의 직업은 듣고 "말"해주는 것. 사람들은 "조언"을 듣기 위해 그를 찾는다. 하지만 제대로 듣지 않고 불쑥 내뱉은 말 때문에, 그의 삶은 위기를 맞는다.
소설은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주인공이 매일 써 내려가는 완성되지 못한 편지, 부치지 못한 편지로 어렴풋이 상황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편지라는 매개체는 내 마음을 솔직하게 터 놓을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지만, 상대방의 답을 들을 수는 없다. 보낼 수 없는 편지이기 때문이다. 편지를 쓰다 보면 내 억울함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고, 그 억울함을 내 탓으로 돌려 끝없는 자기 비하를 하기도 한다. 하루종일 편지를 쓰고, 저녁때가 되면 산책을 간다. 하루종일 쓴 편지를 찢어 버리려고. 그리고 그 길목에서, 길 고양이 순무를 만난다. 그리고 순무라는 매개를 통해 초등학생 세아도 만나게 된다.
어느 순간, 그녀는 자신과 그 작은 생명체 사이에서 어떤 가느다란 유대감이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인간과 동물. 언어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이. 다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정도로, 아주 최소한의 행위만 허락된 관계. 서로에게 완벽하게 무지하다는 난관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진심이 순무에게 전해졌음을 느꼈다. 아니, 그것은 이상한 확신이고 터무니없는 바람일지도 모른다.
순무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울었다.
그는 순무를 구하려는 일이 자기 연민 때문이 아닐까 고민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포기하려던 순간이 있었지만 세아의 부탁에 한 번만 더 시도해 보겠다고 약속한다. 그렇게 덫을 두고 기다린다. 순무의 눈을 바라보며 그저 듣는다.
사람을 판단하는 건 비교적 쉬운 일이다. 아, 저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해. 저 사람은 눈치가 없어. 저 사람은 너무 수다스러워... 그래서 내가 그렇게 행동한 거야. 난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 억울함이 생기는 건 한 순간이다.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다 보면 내 잘못은 없는데 세상은 나만 손가락질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쉽지 않다. 이 책은 주인공과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순무와 세이와의 관계를 통해 조금씩 변화되어 간다.
왜, 경기에 져서? 져서 속상해?
그녀가 묻고 아이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답한다.
아뇨. 그게 아니고요. 엄청 많이 연습해도 지는 건 너무 금방이잖아요. 엄청, 엄청, 엄청 많이 연습해도 공에 맞으면 그걸로 끝이잖아요.
연습은 그냥 연습이잖아. 진짜 시합은 연습한 거랑은 다르고, 진짜 시합이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거니까.
그녀가 답하고 아이가 되묻는다.
그럼 뭐 하러 연습해요? 아무 도움도 안 되는데요.
진짜 그렇게 생각해?
아줌마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아이가 묻는 건 정말 피구에 관한 것일까. 어쩌면 삶에 관한 것이 아닐까. 아이는 그녀에게 질문을 하는 것일까. 선문답 같은 대화를 통해 교훈을 주려는 것일까.
물론이지. 그렇게 생각 안 해. 시합은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지는 쪽이 언제나 배우는 게 더 많은 거야.
정말 그런가. 진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나. 그녀는 생각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자신이 한 그 말에서 위로라고 할 만한 것을 얻는다.
작가와의 인터뷰를 찾아보다가 작가가 소설을 쓸 때 "사람이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는 것은 맞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순간에 자신과 화해해야 되잖아요. 자기를 좀 받아들여야 한다고 해야 될까요.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 이런 질문을 주로 던졌다고 한다. 나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남에게 책임의 화살을 돌리지 않고 그저 나를 받아들이는 것. '나는'이라는 주어를 가지고서는 그게 되지 않았다. 내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순무와 세이를 통해 '남'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 주인공이 고통의 구렁텅이에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벗어나는 모습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삶을 응원하게 되었다.
덧, 책의 표지에는 검은 고양이가 한 마리 그려져 있다. 순무가 아니라 까미다(순무는 치즈임). 까미는 순무와 함께 다니는 고양이인데, 순무처럼 경계심이 없고 사람을 굉장히 좋아하는, 자기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고양이이다. 뭔가 말하고 싶은 표정인 것 같기도 하고, 듣고 싶은 표정인 것 같기도 한 호기심 어린 표정을 보면 나도 모르게 집어들 수밖에 없는 ㅎ ㅎ 그래서 표지에 선정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