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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Jul 27. 2023

담배에 대한 사유

서명숙, <흡연 여성 잔혹사>

담배를 '배워'보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커피와 담배 때문에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고 투덜대던 한 언니 때문이었는데, 그 언니가 넘나 멋져보였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후후 불어 마시면서 담배를 피던 그 모습이 어쩌나 멋지던지! 자기도 이 망할놈의 멋짐(?) 때문에 담배를 피기 시작했고 지금도 못 끊는다고 말하던, 그 모습조차 멋졌던 언니. 

그러고보면 직장을 다닐때, 대학원 다닐 때 주변 친구들과 언니들이 다 담배를 폈다. 그게 진짜 자연스러워서 지금 되돌아보면 오히려 새삼스럽다. 그런데 이상하게 결혼하고 나서는 주변에 담배 피는 무리(?) 들이 사라졌다. (남편 빼고..) 내 주변에 있었던 그 수많은 담배 피던 여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서명숙의 <흡연 여성 잔혹사>는 절판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개정된 책이다. 작가는 "왜 시대와 나라와 계층을 불문하고 여성들에게만 유독 무엇을 하지 마라, 무엇을 하라는 강요가 공공연히 자행되는 걸까?"라는 질문을 하며 이 책을 다시 세상에 내 놓기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 책은 '담배를 사랑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점이 너무 재미있었는데, 왠지 그 때 내 주변의 여자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 다시 모여서 커피 한잔에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와, 나 진짜 담배 끊으려고 했는데~" 또는 "나 그 때 진짜 들킬 뻔 했잖아. 아니, 뭐 들키면 좀 어때. 담배 피는 게 뭐?"라며 시시콜콜한 무용담을 들려주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담배를 피운다.'라는 한 문장에서 주어가 누구인지에 따라 그 문장은 '용기' 또는 '저항' 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작가는 대학때부터 겪었던 담배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여성문제연구회라는 모임을 만든 여학생들이 술집에서 뒷풀이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술잔이 날아온다. 이유는 "건방지게 담배나 피"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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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와중에 누군가가 "건방지게 여자들끼리 담배나 피우고 말이야" 소리를 쳤다. 아! 그랬구나. 폭행의 진짜 배경을 알게 되었다. '감히 여자들까지 모여' '감히 남성의 전유물인 담배를 피워댄' 우리는 징벌받아 마땅한 나쁜 여자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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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에서 재클린 캐내디 오나시스, 명성 황후, 프리다 칼로 등의 익숙한 여성들을 '담배'라는 렌즈로 들여다 본 이야기들도 인상적이었다. 

죽기 직전 그녀는 한 방송 인터뷰에서 "나는 혼자 있을 때 가장 행복했다"고 털어놓았다. '혼자'라는 말은 실존적인 의미를 담은 표현이었겠지만, 흡연자인 내게는 '혼자 담배를 피울 때'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또 에피소드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여성들 (모두 담배를 피고 있는 멋진 모습!) 의 일러스트와 어울리는 문구 배치도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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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것 아닌 담배 하나에 의미를 두게 만든 한국 사회의 복잡하고 이상스러운 생리에 울컥하면서도, 만일의 공격에 대비해 방어용으로 제 나름의 담배 예찬론을 준비한 것 또한 역시 담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겠지요. "그냥 피웠어. 난 담배가 좋아." 이런 심플한 대답을 하거나 아예 사건거리도 되지 않는, 담배에 대한 그런 사유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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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굉장히 폭력적이고 슬픈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쾌활함을 잊지 않는 작가의 문체 때문에 '담배'라는 물건에 대해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나는 왜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가? 그건 건강에 해롭다거나, 비싸다거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마도 '담배 같은 거 피우지 않는 순종적인 여성'이라는 (하나도 쓸데없지만 아직도 공고한 가부장제가 심어준) 자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이 이야기들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처럼 여겨지기 바란다고 했지만, 여성과 담배는 아직까지 "제대로 된 사유"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추천사 빼고) 다 좋았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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