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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Apr 06. 2024

새로운 언어를 상상하는 공부

정희진,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또한 서구 여성사를 개척한 거다 러너의 말대로, 여성/사회적 약자들은 자기 동료의 글을 모르고/읽지 않고 '초기 개척자의 사명'을 반복한다. 여성의 글은 인용하지 않는다. 여성의 지식은 제대로 계승되지 않는다. 그러니 언어의 발전이 없다. 나는 이 문제가 사회적 약자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라고 본다. 이 글을 부록으로 게재하는 이유에는 이러한 문제의식도 있다. 더불어 여성 운동은 대중화되었으나 대중화를 민주주의로 오해하고 있는,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공부하지 않아도 여성주의자가 될 수 있다."라는 인식을 지닌 일부 여성주의자들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정희진 선생님의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었다. '숏컷=페미'라는 이유로 폭행하고, '페미가 묻었다'라고 의심되기만 해도 영상을 만든 제작사가 위기를 맞는 현실에서 이 책을 '안심하고' 추천하고, 가지고 다닐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사고 빨리 읽고 싶어서 며칠 가지고 다니면서 틈틈이 읽었다. 하루는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잠깐 덮어놓고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탁자 위에 놓인 책 표지에 '페미니즘'이라는 글자에 나도 모르게 흠칫, 했다가 (저렇게 잘 보이게 한가운데 펴 놓는다고?) 정희진이라는 이름을 보고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앉아서 계속 책을 읽었다.



                                                                                        *


페미니즘에 관해 가장 많이 되풀이되는 이야기는 '다 안다' 와 '잘 모른다' 인 것 같다. 완전히 상반된 이 두 개념이 '누가' 페미니즘을 말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은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알 필요가 없는 개념이다. 이 세상에 '남성이 아닌' 존재로서의 여성이 있다는 것도 알고, 그 여성은 나를 키워줬거나, 나와 결혼했거나, 내가 먹여 살리는 (또는 책임져야 할) 대상이다. 그들의 '권리'는 가장인 남성에게 있다. 따라서 여성이라는 존재는 남성이 규정하는 것이고, 여성보다 남성이 더 잘 안다. 그러니까 항상 여성이 남성을 이해하려고 애써야 한다. (동굴 속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화성에서 온 남자'를 이해해야 하는 거야 운운..) 


반대로 페미니즘에 대해 여성이 말할 때는 '잘 모른다'라는 조건이 붙기 쉽다.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잘 모르지만,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조건을 붙이고 시작하는 이유는 뭘까. 우리는(여성임에도) 왜 페미니즘에 대해 잘 알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면 가정을 버린 정신 나간 여자처럼, 혹은 마치 남성 사회를 파괴하러 온 (미친) 여자처럼 느껴지는 걸까? (근데 남성'중심'사회를 파괴하는 건 오히려 멋진 거 아닌가 ㅎㅎ)


그래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자주 '잘못 읽힌다.' 이 단어를 쓰는 순간, 받아들이는 사람은 각자의 입장을 가지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건 또 왜 그런 걸까. 우리는 자본주의나 민주주의 같은 단어는 (이 단어들도 물론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되고 쓰일 수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 통용되는 공통의 정의가 있다. 그런데 왜 페미니즘은 여성과 관련된 단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의 이기심, 남성의 위치를 끌어내리려는 음모(?)라는 뜻으로 읽히는 걸까.

나는 어떻게 페미니즘과 만났나. 가족이라는 제도 안에서의 나-현명하고 다정한 엄마, 깔끔한 아내-라는 역할을 해내려고 나를 아무리 갈아 넣어도 그저 내 무덤만을 파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 페미니즘은 나에게 '다른 길'을 보여주었다. 내가 왜 '사람도 아닌' 더러운 기분이 드는지, 그럼에도 매일 밤만 되면 왜 인내심 없는 엄마인 '내 잘못'을 성찰하고 뉘우치며 자책하는지, 내 말은 왜 '힘'이 없는지 알 수 없던 나에게 더 깊은 곳의 '뿌리 깊은 구조'를 보라고 말해주었다.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고 몇 백 년 동안 이어져 온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위에 세워진 사회 구조의 작동원리 때문이라고.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노력이 부족한 개인'이 아니었다. '어떠어떠한 여자가 되어라'라는 사회의 명령을 내면화해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안정된 가족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가진 가장'이 필요하기 때문에 남성은 '결혼'을 함으로써  '가장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한다. 반면, 여성 역시 사회에서 인정받는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결혼과 출산으로 '재생산'을 담당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남성은 이제까지 살았던 삶과 별다른 괴리 없이 시민의 자리를 획득하는 반면, 여성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과 너무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어른들이 "결혼이 쉬운 줄 아냐, 결혼하면 당연히 희생을 해야지, 결혼해서도 자기 생각만 하는 여자는 이기적이다."라고 하는 말이 이런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남성은 결혼을 하면서 자기 몸 희생해서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다 줘야 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지만, 여성은 결혼을 해서 출산하지 않고 직장을 계속 다니면 이기적인 여자가 되고, 출산해서 일을 그만두고 돌봄 노동을 하면 (남편이 힘들게 일할때) 집에서 노는 이기적인 여자가 되고, 직장 때문에 집안 일과 육아에 소홀하면 모성애 없는 이기적인 여자가 되고, 집안 일과 아이 교육에 올인하면 (자기 아이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여자가 된다. 


그래서, 이런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깨닫고 사회에서 여성이 '이등 시민'인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되냐고? 삶이 더 힘들어진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랬다. 분명 페미니즘은 끝없이 떨어져내리는 구덩이에서 나를 끌어올려줬지만,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고, 내 삶은 내 삶이었다. 내가 오늘 <여성성의 신화>를 읽었다고 해서, 남편과 아이가 "축하해!! 드디어 주체적인 너 자신을 찾았으니까 이제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너의 삶을 살아!"라고 하는 건 아니니까. 정신 개조(!) 되는 건 순간이고, 누군가의 아내로서,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며느리로, 누군가의 딸로 살아야 하는 내 삶은 그저 그대로 계속되었다.


쟁점은 우리가 젠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다. 젠더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젠더를 이해할 때 미투 운동의 위치도 가늠할 수 있다. 미투는 젠더 체제에 비하면, 너무나 갈 길이 먼 시작이자 동시에 엄청난 사건이다. 미투는 거대한 우주에 비하면 먼지만 한 움직임(범죄 신고 캠페인)이지만, 이 작은 실천조차 남성 문화는 모든 것을 빼앗긴 것처럼 분노하고 있다. 그들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여성의 작은 목소리만으로도 자신들이 진공 상태에 내몰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러한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남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는 그들을 '이해한다'.


우리가 토론해야 하는 것은 이 '두려움'이 어떤 사회를 향한 징조인지, 어떤 사회를 추구하는 정지 작업으로서 미투인지를 되묻는 일이다. 


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것도 어쩌면 '먼지만 한 움직임'에 불과할지 모른다. 나는 여전히 일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예전의 나와는 다른 일상이다. 낯선 세계를 만나면 처음엔 멈칫하지만 그것에 대해 알면 알수록 다른 매력에 빠져들게 되듯이 페미니즘에 대해서 더 알고 싶고 공부하고 싶어서 책을 읽으면서 나는 조금씩 세상을 보는 나만의 시선을 가지고, 다른 길에 대한 상상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여성들의 '글'을 만났다. 어쩌면 출판되지 못했을 수도, 번역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글들은 '살아남아' 나에게까지 왔다. 그리고, 사실 내가 읽은 여성 작가들의 글보다 훨씬 더 많은 글들이 쓰이지 않았거나,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정희진 선생님의 말처럼 "여성의 글은 인용하지 않는다. 여성의 지식은 제대로 계승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살아남은 여성의 글들은, 또 다른 여성들을 '살린다'. 그리고 더 많은 여성들을 '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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